우리들 마음에는 뭔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길음동 피난처를 정리하고 미처 적절한 이름을 짓지 못한 수유리 새집으로 이사를 하며,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동거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우리들의 관계를 되짚어봅니다. 새 식구를 맞이하고 묵던 이를 떠나보내는 흔들리는 빈 터전은 우리들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서로 어떤 관계의 끈을 끊일 듯 이어가고 있었는가?
격리되어 고립된 외딴섬처럼 보여지는 피난처가 들고나는 식구들로 열린 공간이 됩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묵은 사람이 휭 떠나고 나면, 자기 몫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새사람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두려움에 굳은 얼굴로, 협박에 시달리는 도망자의 찌든 차림으로, 슬픔에 지친 차가움으로, 때로는 욕탐을 그대로 드러내며 혹은 분노의 발톱을 어설프게 숨긴 채로, 한 몸뚱이 인생이 짐스러워 축 늘어뜨리기 시작하여 순간순간 눈물을 질금거리기도 하고, 분노를 터트리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며, 몸을 부대끼는 혼거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며, 또 무엇이 되어 헤어지는지?
숱한 사연과 우여곡절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하나의 상처에만 급급하여 움켜쥐고 씨름하며 우리를 왜곡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담담히 겪어 오는 동안 같은 종류의 묵직한 인생경험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디서 기인하는 지 도대체 알 길이 없는 깊은 신뢰가 생기곤 했습니다. 우리들은 부족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고 힘겹지만 서로 정성 드려 들으면서, 우리들의 억압된 분노와 고통을 받아들여 표현하고, 그 에너지를 건강함과 강인함을 되찾는 작업에 쏟아 부어가며,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나도 어느 수인의 고백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단숨에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모여 살게 된 것을 행운으로 알고, 세상의 슬픔에 우리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우리의 슬픔도 세상의 수많은 슬픔 중에 한 조각 일뿐이라는 겸허함을 배워갑니다. 힘겨운 자기 노출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연습 속에서, 우리의 무거운 침묵을 열고 수다를 거둬내는 실험이 지속됩니다. 우리의 고난을 이겨내려면 없는 듯 그저 단촐하게 함께 사는(interbeing) 방법 밖에는 다른 수가 아직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