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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첫 번째 자원활동

사법연수원 2학기 시험이 끝난 작년 12월 13일부터 12월 말일까지의
약 보름 남짓의 기간은 저로서는 참으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2학기 시험이 시작되기 전, 시험이 끝나면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일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공감’의 게시판에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글을 올릴 때에는 ‘설마’ 하는 마음이 많았는데, 의외로 ‘공감’의 김민경 간사님께서 자원봉사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취지로 답변을 주셔서 무척이나 놀라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사실 그동안 저는 자원봉사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에 와서는 사법시험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학생회에서 하는 여러 활동들에 대해 무관심했었습니다. ‘아직 나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 ‘내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등등의 이유로 그런 일들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저의 무관심을 합리화 해주던 고시생의 신분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됐지만, 상황은 고시 공부할 때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해야 할 그 무언가’는 항상 남아 있었고, 치열한 경쟁 속에 저는 또다시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왜 사법시험을 공부했냐고 물으면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서’ 라는 틀에 박힌 대답을 하던 저의 모습이 자꾸만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 공익활동에 대한 저의 무관심과 게으름을 합리화해 줄 핑계는 항상 존재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할 수 없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할만 한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보던 중 박원순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제가 ‘공감’에서 일했던 기간 자체가 2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변호사님의 사무실에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공감’에서 제가 했던 일은 딱 두 건 뿐이었습니다. 처음 했던 일은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8조에 관한 법원의 태도를 분석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 라는 외국인 단체에 대한 언론기관 등의 명예훼손 사건을 검토하는 일이었습니다.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하에서는 성폭법이라고 줄여서 쓰겠습니다) 제8조는 장애인에 대한 준강간을 처벌하는 조항입니다. 준강간이란 폭행이나 협박을 가하지 않고,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위 법률조항은 장애로 인하여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간음하는 것을 처벌하는 조항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법원에서는 대략 17세 이상인 정신지체 장애인의 경우 ‘항거불능’ 상태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간음을 처벌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법원은 평생 동안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없는 1급의 정신지체 장애인을 간음한 범인에 대해, 성폭법 제8조에 의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는 장애여성을 보호하고자 제정된 조문이 오히려 장애여성을 강간한 범인을 보호하는 조문으로 바뀌어 버린 격입니다.

또 다른 일은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 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을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라는 단체는 한국 거주 외국인 노동자들이 만든 순수한 친목단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 단체가 마치 테러조직인 것처럼 말했고, 언론에서 아무런 조사도 해보지 않고 이를 기사화하여 문제가 된 사건입니다. 검토 결과 일부 언론기관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인한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해 보였지만, 이 사건에 대해 정작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때문에 책임을 묻는 것이 어려워 보였습니다. 가장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니 무척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우리 사회가, 같은 유색인종이면서도 유독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처음의 의욕과는 달리 보름 남짓한 휴가 기간동안 그렇게 딱 두 건의 일만을 하고, 새해가 시작되자 저는 대전으로 실무수습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저의 모습에 많이 실망하고, 저 자신조차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감’의 변호사님들께서 많이 격려를 해주셔서 무척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법연수원에서도 공익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1년차 연수원생들 사이에 순서를 정해서 인터넷 법률상담을 하고, 1학기 여름방학 기간 동안에는 2주 정도 법률상담봉사를 나갑니다. 또 1학기 중에도 하루 정도 장애아동 또는 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사법연수원생들의 의무사항으로 부과되어 있기에 자발성이 떨어지고, 이에 대한 평가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인은 연수원생들에게 있기 보다는 현행 판·검사 선발방식이나 연수원의 교육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수원생 1000명이 1년에 한 건만 자원봉사를 해도 1년 동안 1000건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연수원의 현행 평가방식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조계의 변화의지와 국민들이 사법부에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기 때문에 조만간 이러한 문제점은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글을 쓰고 나니 쑥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그렇지만 저도 몇 년 후에는 ‘공감’의 변호사님들처럼 ‘남의 일’을 돕는 것을 ‘나의 일’ , ‘나의 보람’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법률가가 되리라는 다짐으로 그러한 쑥스러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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