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과 함께한 씨네토크 – 기독교의 본질을 묻고, 진정한 사랑과 관용을 생각하다
▲ 지난 11월 26일 건대시네마테크에서 성소수자인권을 주제로 공감 월례포럼이 열렸다.
“기독교의 본질, 가장 기본이 되는 본질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어떤 일이 교리에 어긋난다고 믿더라도… 혐오와 저주를 쏟아붓는 게, 그게 과연 사랑의 실천인지 묻고 싶어요.”
지난 11월 26일, 다큐멘터리 영화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의 관람 후, 이어진 관객과의 토론 시간에서 김조광수 감독은 차분하게 말했다.
9월 7일, 공개적으로 ‘당연한 결혼식’을 올리며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나란히 토론 패널에 앉아 공감과 이해심이 섞인 시선으로, 때로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교환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신혼부부의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째서 축복 대신 저주를 받아야 했던 것일까.
소통의 부재, 그리고 두려움
오물 투척, 수만 개의 악플, 욕설과 비방, 그리고 ‘죄인’이라는 낙인. 참 아팠을 상처들이다. 이들 부부의 상처가 더 아프고 억울했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비판과 혐오의 시선이 종종 무관심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무분별한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를 모른다. 아니, 동성애자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이들의 삶을 직접 지켜본 적이 없고, 연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깊이 대화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한다. 원래 가지고 있던 편견과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에 따라 이미 판단을 내려버리고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무시한다.
무지함과 무관심만을 가지고 던진 돌멩이는 더 아프다. 내 입장과 내가 받은 상처를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소통의 길 그 자체가 닫혀있기 때문이다.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 영화 내용 중에 커밍아웃한 로빈슨 주교가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한 교인이 벌떡 일어나 고함치는 부분이 있다. “당신 때문이야! 이 사탄! 교회의 분열자!” 설교를 방해하고 끌려나가는 순간까지도 소리를 지르는 이 교인은 소통 거부의 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귀를 막고 자신의 말만 고함치던 이 남자의 행동은 과연 사랑과 관용의 실천이었을까? 진정한 교인의 모습이었을까?
로빈슨 주교는 그날 설교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라고 했다. 아직은 너무나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동성애’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경계하는 건 사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기존에 있던 질서와 믿음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피해를 입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성숙한 사회는 이런 두려움을 인정하고 소통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다름’에 대한 두려움이 배척과 경계심으로 이어지고, 약자의 목소리는 억눌리고 있다. 김승환 대표는 약자를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은 “병든 사회”의 표식이라고 말한다. 욕설 가득한 악플에 시달리는 김조광수 감독을 보며 결국 일일이 신고했던 적이 있는데, 막상 만나보니 오히려 김조광수 감독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조용한 성격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정서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나보다 “만만한” 대상을 찾아 표출하는 것이다. 원망보다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김승환 대표는 덧붙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사회적 힐링”인 것 같다고.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두려움은 악순환을 반복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신공격, 무차별적 비방과 차별은 당사자들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 자체를 피하게 만들고, 동성애자 입장에서의 경험과 의견을 내놓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동성애자의 부재 속에서 이성애자들의 편견, 루머, 추측성 발언들은 동성애에 대한 더 큰 편견과 두려움을 낳는다. 김조광수-김승환 부부가 대중 앞으로 나서며 겪는 고생이 안타까우면서도 이들의 용기가 소중한 이유다.
▲ 영화 관람 후, 씨네토크에 참여한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이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편견을 버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이 날 관객과의 토론 시간에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 혼자 영화관에 등장한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다. 쑥스러워하며 마이크를 잡고서는 이내 또박또박 자신이 참석한 이유를 말했다. 학교의 과학탐구 주제로 “동성애”를 선택하고 “탐구”하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 학생은 곧 자신의 주제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성애의 “원인”을 조사해봐도 도무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남녀 간 사랑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만큼이나 동성애자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 “원인”을 찾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 과학탐구는 망했어요”라며 호탕하게 웃는 그 학생을 보며 다른 관객들 사이에도 웃음이 터졌다. 이 학생은 또 그동안 친구들을 배려하지 못하고 게이라며 놀리고, 상처 주었던 자신의 행동이 많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자신이 잘못한 점을 선뜻 인정하고 반성하는 순수함이, 주변 친구들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아는 성숙함이 우리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자신의 귀는 닫고 고함만 지르던 영화 속의 어른과는 실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고등학생이 실천하는 단순하고 당연한 배려와 존중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자주 결여되어 있다.
김조광수 감독의 말에 따르면,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 영화는 세계적으로 전체관람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었다고 한다. 영등위에 찾아간 김조감독에게 관계자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다,”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모방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떻게 동성애를 똑같이 대하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가진 편견을 바로 직시하지도 못하면서 이미 편견에 따라 동성애를 판단하고 차별하고 있었다. 손안에 쥔 돌을 살펴보지도 않고 “난 몰랐어”라며 던져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편견과 차별의 말을 내뱉기 전에, 적어도 내가 가진 생각과 뿌리 깊은 편견들을 재고해보는 정도의 “성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 영화 관람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사랑과 관용의 기독교 정신, 그 실천의 필요성
동성애에 대한 비판의 선두에는 종종 기독교 단체와 교인들이 있다. 독실한 신자들이 교리와 관련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분명 이해가 간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전지전능한 신은 있을지 몰라도,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늘 옳았던 것만은 아니라고 로빈슨 주교는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사실 인종차별이나 여성 차별의 근거로 성경 구절이 인용된 적도 있었고, 성경에 근거한 믿음으로 유대인들이 차별받고 학살되었던 적도 있었다. 반면 오늘날, 이런 방식의 해석과 차별을 지지하는 기독교인은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 기독교를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당시의 시대와 해석에 맞추어보면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도, 다르게 생각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단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이던 김조광수 감독은 ‘퀴어 신학’을 듣고 배우며 성경 몇 구절도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죄인’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 아닐까. 역사는 이를 증명해준다.
그렇기에, 대화의 창을 닫고 동성애자를 배척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얼마 전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계획되었던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 상영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제출해서 확정되었던 기획안이, 갑작스럽게 기독교 단체의 압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던 것이다. 단순히 동성애에 관한 이벤트라는 이유만으로 토론조차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일까, 김조감독은 묻는다.
‘사탄,’ ‘죄인’이라는 ‘낙인 찍기’ 역시 성숙한 종교인이 취할만한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슷한 방식으로 인한 전쟁, 마녀사냥, 박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이런 폭력성을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차이점은 창과 칼 대신 무신경한 말과 행동을 무기로 정신적 폭력과 살인이 자행된다는 점이다. 나의 신념을 존중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인격과 신념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낙인찍고 비방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인격체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일은 비단 종교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속한 한 개인으로서의 우리 모두가 가진 의무다. 교회에서는 모두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설교하고, 뒤돌아서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은 종교적 모순이자 개인적 오만이다.
김조광수 감독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렇다면 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진정 동성애를 죄악이라도 확신한다고 해도, 혐오와 저주는 한 인간을 대하는 인간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김조감독이 강조한 것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관용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과 관용은 절대로 남을 짓누르고 열등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없다. 기독교 사회의 대응이 설교보다는 대화로, 주입보다는 소통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수만 개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설교를 하지만, 반대 의견이 토론될 기회 자체를 막아버리고 대화를 차단해버린다. 자신의 귀를 막고 고함만 지르던 영화 속 남자의 모습이다.
사랑과 관용. 이 근본적인 본질을 무시하면서 성경 구절에 따라 동성애를 박해하는 것은 절대로 기독교인 다운 행동일 수가 없다.
글_양지희(18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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