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남기
한국의 “언터쳐블” – 난민
‘다문화사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까? 결혼이민자, 혼혈인, 이주노동자? 이 정도가 보통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난민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민을 떠올릴 수 있을까? 과연, 몇 번째로 우리 머릿속에 난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를까?
한국은 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첫 난민인정자는 2001년에 이르러서야 나왔으며, 2008년까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이제 겨우 100명을 넘었다. 그만큼 난민은 이주민과 관련한 이슈 중에서도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리고 한국사회가 경제, 사회적으로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고, 살아가기 위해 이 땅을 찾을 것이다.
1월 월례포럼에서는 2004년 난민으로 인정받으신 방글라데시 출신 로넬씨를 모시고 한국에서의 난민의 삶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 오게 된 사정, 줌머족에 대한 설명, 난민으로 인정받은 과정과 이후 한국에서의 생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특별한 다문화 사회, 줌머족
로넬 씨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역(Chittagong Hill Tracts, CHT)의 줌머족 출신으로 방글라데시 정부의 탄압을 피해 94년 한국에 오셨다. 줌머족은 치타공 산악지역의 토착 소수민족들을 부르는 말로 ‘화전 농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의 주류 민족인 ‘벵갈리’와 민족성, 종교, 언어, 사회관습, 전통과 생활 방식이 다르다. 줌머인들은 방글라데시가 생긴 71년 이래로 심각한 인종차별, 학살 등의 다양한 탄압과 박해를 받아왔으며, 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지금까지도 방글라데시 정부와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위협들은 지속되고 있다. 박해를 피해 많은 수의 줌머인이 외국으로 피신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약 50여명의 줌머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로넬씨는 줌머족을 ‘특별한 다문화사회’라고 표현했다.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자랑할 만한 다문화 사회.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이제 겨우 이곳이 다문화사회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한국사회에서 그는 줌머족이라는 작지만 특별한 다문화사회를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한국의 “언터쳐블”
한국의 난민인정자 수가 적은 이유는 한국의 난민신청절차 지나치게 장기간이며, 언어문제 등으로 인해 난민들이 절차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 인정 기준이 까다롭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로넬 씨는 불친절한 공무원과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을 통하여 난민이 한국사회의 “언터쳐블”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줌머족이 방글라데시 주류 민족인 ‘벵갈리’인들로부터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음을 이유로 난민신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심사면담과정에서 벵갈리인에게 통역을 맡긴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난민관련 실무에서 인권적 감수성을 기대하기란 아직도 멀고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도 한국사회의 구성원입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며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함’을 첫 번째로 꼽았다. 월례포럼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예상했던 답변들-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에서의 차별과 편견 등- 과 너무나 다른 답변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람들의 차별이나 편견은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도 겪는 문제이며, 일반적인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신을 난민으로 받아들인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국가가 난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말하는 그를 보며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난민을 사회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여전히 어렵기만 한 질문거리를 남기며, 2009년 첫 월례포럼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