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오랜 개념에 대한 고찰 – 생활동반자관계법 토론회를 다녀와서
“장기를 기증해
주세요.” 애처로운 유언에 피가 얼룩졌다. A 씨는 암 투병 중이던 B 씨의 임종도 보지 못한 채 아파트 화단에 몸을 던졌다. 함께 살던 B
씨가 중병에 걸린 후, 그녀의 조카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내민 ‘법정 상속인’이라는 명패에, A 씨는 완벽한 ‘타인’이 돼야만
했다.
B 씨와 함께
살던 집에도, 그녀가 누워있는 병동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40년을 동고동락한 그녀는 분명 B 씨의 가족이었지만, 제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승을
떠나는 길목에서, A 씨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가족이 아닌 가족’ B 씨에게 선물했다. 지난 10월 부산에서 일어난 두 여성의
비극이다.
이 비극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함의는 무엇일까. 두 노년여성의 삶에서 드러나는 고충일까, 아니면 재산권을 둘러싼 ‘조카의 난’이 드러내는 혈육의 매정함일까.
그보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누군가에겐 제 식구를 따스하게 감싸는 견고한 울타리지만, 누군가에겐 차갑고 높은 벽이
되기도 하는, ‘가족’ 말이다. 실로 그 오랜 개념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때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미 다양한 가족으로서 살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한 가족이란 혼인이라는 ‘제도’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들이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무지한 탓에,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이기적인 존재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사회 내 경제적 기본단위, 돌봄이라는 의미에서의 복지 제공 등, 흔히들 말하는 가족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가 생각하는 가족의 요건과 범주가 조금 달라, 혼인이라는 제도로서의 가족을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들도 많다. 비용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현 제도가 정한 가족 구성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족
개념의 외연을 넓힘으로써 이들이 맺은 다양한 결합을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 변화한 인식에 비해 제도는 지체한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생활동반자관계법의 목표다. 7월 3일 있었던 생활동반자관계법 토론회의 포문을 연 김상희 국회의원과 제1 발제를 맡은 진선미 국회의원 역시
밝힌 바 있다. 평생의 동반자로서 ‘특별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게, 본 법안이 지향하는 최우선의 가치임을
말이다.
제2 발제를
맡은 장서연 변호사는 본격적인 법안의 내용 및 입법 효과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최우선의 가치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즉, 본 제도는 이성 및
동성커플들의 관계를 전부 포함함으로써, 모두의 인권존중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생활동반자 관계를 논할 때 다수의 비판은, 이 제도가
이성커플들에게는 기존의 혼인과 다를 바 없기에, 동성커플들을 위한 단계적 혼인으로서의 역할만 다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비교법적
논리로 보더라도, 이성커플을 포함한 유사 제도의 입법 효과는 충분히 드러난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공동생활약정 PACS의 경우, 2004년
전체 등록커플 중 이성커플의 비중이 80~85%에 이르렀다. 또한, 제도적용의 대상과 무관하게, 본 법안은 관계의 성립, 해소, 효력 면에서
기존 혼인의 획일성, 경직성을 지양하고, 공동생활로 발생하는 각종 권리의 보호를 반영하고자 한다. 이로써, 독자적인 제도로의 안정을
꾀한다.
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구체적으로, “생활동반자관계”는 개인 간 자유로운 합의로 맺어지는 계약관계를 상정한다. 따라서 친족 간 결합으로 인한 인척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상속의 효력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 혼인과의 핵심적인 차이다. 재산의 약정과 관계의 해소 과정에서도 차별화되는 측면이
있다. 현행 민법이 부부재산약정을 ‘혼인성립 전에’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생활동반자관계법은 “생활동반자관계를 등록할 때 또는 관계의
지속 중에”도 양자 간 합의에 따라 약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현행법의 경우 일방이 해소를 원하더라도 협의상
혹은 재판상 이혼이 아니라면 관계의 해소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와 달리, 본 법안은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 관계 해소의 의사를
표시했음을 증명한 경우라면, 신고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정하고 있다. 요컨대, 공동재산에 대한 합리적 의식과 부부공동생활의 파탄에 대한 구제로서의
이혼 관을 반영하려는 시도다. 더불어 사회보장, 세제혜택, 가정폭력에 대한 특별보호 등을 적용하기 위해, 생활동반자관계에서 발생하는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각 개별법에 신설하고자 한다.
발제 후,
법률안의 보완방향을 지적하는 토론시간이 이어졌다. 조숙현 변호사는 다양한 결합들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법안의 취지를 더욱 구체화하는 과정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특히 생활동반자관계법이 상속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산분할청구권에 대한 보충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예컨대
사망으로 인해 관계가 해소된 경우, 공동의 노력으로 형성한 재산에 대해 생활동반자가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의 구체화다. 또한, ‘정당한
이유’ 없이 관계를 해소하는 경우 과실이 있는 일방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그 정당한 이유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제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장서연 변호사는, 관계의 해소 이유에 가정폭력 등의 상황이 존재할 경우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한
권한을 명시하는 형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임을 설명했다.
조주은
입법조사관은 생활동반자관계의 해소 과정에서 자녀의 법적 지위 등을 고려한 해소사유와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덧붙였다. 해소의 제한이 완화된
만큼, 이를 더욱 세심히 검토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권리 보장을 위한 여러 개별법을 개정하는 차원에서는, 각종 돌봄 및 주거권과 관련한 개별법을
더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생활동반자 관계가 차별받지 않기 위한 보완장치의 마련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상속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가장 중요했다. 현행법이 가족관계의 본질로 삼고 있는 상속의 경우, 사회 내 경제적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본 법안을
독자적인 가족제도로 인정할 실익을 위해, 최소한 상속의 권한만큼은 명시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장서연 변호사는, 생활동반자 관계
지속기간 중 쌍방합의에 기반한 재산약정을 통해, 사망 이후의 재산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보완이 가능할 것임을 설명했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특별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결합을 존중하자는 취지에 동감하며, 나아가 이를 독자적인 제도 차원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후속 검토 및 조치가 시급함을 함께 깨달으며 토론회는 막을 내렸다.
조금은 가벼운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토론회를 마치고 국회를 나와 들어선 지하철역, 곧 열차가 떠날 것임을 알리는 소리에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앞에
보이는 건 굳게 닫힌 스크린도어뿐이었다. 그 사이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내 모습이 비쳤고, 실망하던 찰나 다시 문이 열렸다. 괜스레 뿌듯한
마음에 한껏 어깨를 올리며 자리에 앉은 순간, 나는 문득 법이 정하고 있는 제도 밖에서 동반자와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떠올랐다. 가족이란 제도의
높은 벽이 닫히는 매 순간, 그들은 이렇게 철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잠깐이라도 벽이 열리고 그 너머로 발을 뗄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겠지. 지하철 스크린도어와 가족제도가 웬 말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다만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도 따뜻한 울타리인 가족이, 누군가에겐 언제나 차갑고 높은 벽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글_김효빈(공감
19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