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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인권# 취약 노동

무늬만 프리랜서, 고 이재학PD의 죽음을 기리며 – 고 이재학PD 사망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

청주방송의 이재학PD가 남긴 유언입니다. 이재학PD는 14년 간 청주방송에서 일했습니다. 청주방송은 이재학PD를 프리랜서로 규정했지만, 이재학PD는 청주방송의 PD로서 오로지 청주방송만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재학PD가 동료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2018년 4월 청주방송은 이재학PD를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시켰습니다. 청주방송에서 쫓겨난 이재학PD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청주방송을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밖에 없었었습니다. 그러나 소송은 해법이 되지 못했습니다. 청주지방법원은 이재학PD가 청주방송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결했고, 이재학PD는 1심 판결문을 받은 직후 목숨을 끊었습니다.

2020년 2월 19일 <CJB 청주방송 이재학PD 사망 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대책위원회는 “방송사들이 아무리 시민과 노동자의 눈과 귀를 막아도 입까지 막을 수는 없다. 노동 착취의 구태에 빠진 방송사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대의 변화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재학PD의 문제를 알리고 청주방송을 규탄하는 활동이 이어졌고, 2월 27일 청주방송, 대책위원회, 유족, 전국언론노조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를 수용하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과 개선방안을 즉시 이행하며 이행 현황에 대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점검을 받기로 합의서에 명시했습니다.

합의서에 따라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유족 추천 3인, 노조 추천 3인, 청주방송 추천 3인, 대책위 추천 1인의 총 10명으로 구성되었고, 저는 유족 추천 위원 겸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대변인으로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하였습니다. 3월 3일 첫 회의가 열렸지만 청주방송의 불성실한 태도로 조사는 지연되었고, 4월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비정규직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집단/개별 면담 조사를 진행했고. 비정규직 외에도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벌였습니다. 각종 문서와 자료들을 확보하여 서면 조사를 실시하고 두 번에 걸쳐 현장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진상조사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주방송은 방송제작인력에 대한 수요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필요한 인력의 상당 부분을 프리랜서로 사용할 수밖에 없고, 업무의 특성상 개인의 자유로운 전문성과 창작성이 요구되므로 종속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는 비단 청주방송만의 주장은 아닙니다. 모든 방송사가 이런 식의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방송제작현장이라고 해서 노동자성을 더 느슨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재학PD는 청주방송에 전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했고, 청주방송에서 정한 노동력에 대한 대가 외에 수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방송은 이재학PD가 동료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담당하던 프로그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업무를 없애고 사실상 해고를 했습니다. 청주방송은 이재학PD와의 소송에서 위법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재학PD를 위해 진술서를 써준 동료들을 질책, 회유하고 거짓된 사실관계확인서들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위증을 하고 명백한 사실마저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이 과정이 이재학PD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해고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판결을 기대하며 버텼는데 남은 것은 좌절과 부조리한 현실뿐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상황은 이재학PD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청주방송에는 많은 비정규직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가 이재학PD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프리랜서라 불리는 AD와 작가 직군이 있고, 불법파견이라 볼 수 있는 MD 직군과 청주방송 자회사 소속 직원들이 있습니다. 경비, 청소, 운전, 행정, CG처럼 상시 지속적 업무지만 용역/파견 형태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하는 일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불안정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일을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청주방송은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이야기했고, 그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것처럼 호도했지만 결과는 불합리한 급여 기준, 주먹구구식 운영과 각종 차별로 나타났습니다. 괴롭힘과 성희롱도 빈번했습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다른 존재, 명령하고 하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바라며 혹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불합리와 수모를 감당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재학PD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랜 논의를 거쳐 진상조사위원회는 이재학PD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징계, 공식적인 사과, 이재학PD의 명예 회복을 위한 추모, 유족에 대한 보상을 청주방송에 요구했습니다. 또한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프리랜서 직군, 불법파견 노동자들, 기타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할 때까지 고용을 유지해야 하고, 정규직 전환 후 이전보다 노동조건을 저하하는 일은 없도록 요구했습니다. 정규직 전환 과정 및 노동조건 결정 과정에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참여도 보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단일한 임금체계, 주먹구구식으로 개별 비정규직마다 달리 운용되고 있는 채용, 업무 분장, 계약 해지 등의 방식을 일원화하고 정규직과 차이가 없도록 복리후생 등의 처우 개선, 조직문화 개선 등도 요구했습니다. 또한 전체 방송사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이번 진상조사가 시금석이 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에 고용 건전성 기준을 강화한 재허가 조건, 표준계약서 현실화 방안, 방송제작 노동자의 고용보험 적용, 방송사와 비정규직의 상생방안을 청주방송에 함께 제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청주방송은 태도를 돌변하였습니다. 청주방송의 대주주인 이두영은 대책위원회 대표들에게 명예훼손을 이유로 1억 원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진상조사 결과를 기다리던 대책위원회, 그리고 함께 대응하고 있는 수많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시금 청주방송을 상대로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도 보고서를 전체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 진상조사 보고서를 공개합니다. 관심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상조사 보고서 바로가기▶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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