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변호사회의 둘째 날 : 인권과 사회운동, 그리고 인권변호사는 어디에 서 있나
[세계인권변호사회의 둘째 날 : 인권과 사회운동, 그리고 인권변호사는 어디에 서 있나]
아침부터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됐습니다. 환영 인사, 참가자별 소개, 회의 배경 설명 등이 이어졌습니다. 오전에는 가볍게 이번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 그리고 무엇을 지향하면 이곳에 와 있는가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가치”에 대해서는 다양성, 용기, 기여를 얘기했고, 그밖에도 연대, 인내, 열린 자세 등이 언급됐습니다. “지향”으로는 혐오에 대한 반대, 피해자 중심의 접근, 그리고 인권개선을 위한 시스템적인 접근을 제시했고, 평등, 민주주의, 인권에 기초한 개발, 인권에 대한 사회운동적 비전 등이 얘기되었습니다.
점심때는 미국 플로리다 지역정의프로젝트(Community Justice Project)에서 일하는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이티 지진 이후 현지에서 여성 성폭력과 관련된 활동을 소개했고, 저는 재난상황에서의 인권적 접근의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비록 국제기준 등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피해자의 알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 등 피해자 중심의 접근의 모범사례 찾기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마침 플로리다에서도 허리케인 이후 재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의 변화가 모색되고 있고, 여러 주체들의 공동으로 재난 대응에 대한 새로운 정책적 틀을 모색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찾고 있던 내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후에도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습니다.
이어서 미국의 헌법권리센터(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 CCR) 변호사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 중 한명은 제가 2012년 하버드로스쿨 국제인권프로그램에 객원 펠로우로 있을 때 미국 내 천주교 신부들의 성범죄 사건에 대해 발표도 하고 자문회의도 하러 왔던 이여서 반가운 재회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들과는 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다루는 것의 어려움을 얘기했습니다.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를 대리하며 미국 내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던 경험, 테러리스트가 아닌 무슬림정치단체 지도자를 대리하며 겪었던 어려움, 그리고 적법절차의 추구가 특정 정치세력의 잘못된 정치적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의 딜레마 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저도 제가 대리한 미얀마 난민분이 반로힝야 운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 등을 언급하며 늘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오후에는 전 세계 각지의 인권활동가, 변호사들 9명이 현재 사회공동체들의 상황이 어떠한가, 어떤 어려움이 있고 인권변호사들의 역할은 어떠한가에 대해 짧게 발표하고 전체, 그리고 소그룹으로 집중적인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페루의 인권활동가는 미국광산개발회사의 환경파괴와 인권침해 사례와 더불어 “mother nature” 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의 한계를, 미국의 변호사는 플로리다에만 백만 명에 이루고 있는 미등록 이주민의 열악한 생활, 구금 상황을, 남아공의 활동가는 물, 전기 공급, 주거, 실업, 불완전고용 등 전반적인 경제적 문제들이 분산되어 대규모 파업이 벌어져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활동가는 극단적 국가주의, 포퓰리즘의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응이 충분히 전략적으로 사고되고 조율되고 있지 못한 상황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스페인의 활동가는 주거권 운동과 관련해서 당사자들이 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인도네시아의 활동가는 민주주의, 법의 지배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비폭력저항과 정치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우간다 활동가는 성수수자인권문제를 다룸에 있어 법원만을 바라보며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역사회 구성원들과 지속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과테말라의 활동가는 선주민,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의 도구로 쓰여 온 법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의 한계를 언급했고, 아이티 활동가는 당사자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의 현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려운 법률용어만을 나열하는 변호사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변호사들과 함께 한 소그룹 토론에 이어 마지막 세션에서 다음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회의의 핵심 표현인 ‘운동변호사’(movement lawyer)라는 표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역사회와, 사회운동과 함께하는 변호사라는 의미는 이해하지만 그 표현 자체는 번역되는 나라의 맥락에 따라 매우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표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잠재적 지지자 등 많은 이들을 배제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또한 오늘의 논의를 함께하면서 들은 생각 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 문화, 전통, 역사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같은 언어를 얘기하고 있어도 실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얘기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소송에 집중해 온 변호사들,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한 변호사들, 단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 운영하면서 소송, 법제개선, 캠페인, 교육 등을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변호사들의 다양한 경험과 역사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구체적인 맥락과 함께 잘 이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권변호사의 역할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점은 변호사들의 한계, 딜레마, 문제점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변호사는 아무리 지역사회에서 함께 힘들게 생활하고 집이 없고 배고파하더라도 특권계층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권변호사는 스스로 그러한 선택을 결정한 것이지만 취약집단과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아무리 진보적인 인권변호사라 하더라도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법적인 접근을 하는 기술자로 인권적 상상력과 인권감수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변호사들은 네트워크 내부에서나 일반 대중에게 논리적이거나 설득력 있어 보이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사람들이 변호사들의 얘기를 더 경청하고 따르는 경향을 가질 수 있는데, 변호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가 사회운동의 지도자인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문제해결의 전 과정에서 이러한 변호사들의 상황을 충분히 확인하고 이식하지 못하면 변호사들은 언제든 문제해결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항상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운동변호사’(movement lawyer)를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인권활동을 하면서 변호사에게나 활동가에게 사실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제대로 정리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함께하는 것’일까요. 지역사회 구성원들은 배제된 채 지도자들과 주로 논의를 하는 것은 어떠한가요. 지역구성원들의 요구가 가해자를 죽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던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 간 한국에서의 세월호 참사 직후 저는 피해가족들과 거의 1년 가까이 함께 생활했지만 저는 매일 자문해야 했습니다. 과연 저는 피해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분노와 불신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2-3달 동안은 피해가족들의 회의가 끝까지 진행된 적이 거의 없었고 어떤 분은 중간에 나가기도 하고, 어떤 분은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변호사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의 뜻을 거역하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공동체와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좀 더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는 마침 생일을 맞이한 남아공 활동가를 위한 깜짝 파티가 열렸습니다.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글_황필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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