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를 마주할 “준비”가 부족하다
텔레그램성착취 사건의 주요 가해자들이 이름과 얼굴을 가진 자들로 우리 앞에 내보여졌습니다. 이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셨나요? 저는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피고인들이 피고인석에 앉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다 밝혀질 수 있을까요? 경찰과 검찰, 법원이 접근할 수 있는 진실이 어디까지일지, 이미 피해자 조사 없이 종료되어버린 피해 사건들, 일부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문을 제출하는 피고인의 전략 아닌 전략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제가 지원하는 한 피해자는 가해자(들)의 계속된 피해촬영물 유포협박에 신고를 결심했습니다. 작년 겨울, 밤 11시 경, 가해자의 협박과 회유가 이어지는 대화가 계속된 그 휴대폰을 그대로 들고 경찰서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경찰은 이런 건 어차피 못 잡는다며 피해자를 돌려보냈고, 내일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협박에 응하지 않자 가해자는 피해영상물을 유포해버렸고 대화방도 사라졌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촬영물이 불법 사이트나 텔레그램 방에서 유포되고 있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됐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침에 다시 경찰서에 찾아갔을 때 담당자는 다시 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를 방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건 접수 후 진술조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피해자의 마음을, 상상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피해자 권리, 조금만 빨리 만났다면 달랐을까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건지원이 신고단계에서부터 촘촘히 이뤄졌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봅니다. 가명조서가 작성되고 국선변호사의 조력을 받기로 선택했을 수도, “먼저 사진을 보낸 것 아니냐”는 비난 섞인 질문에 “부적절하니 답변 않겠다” 당당했을 수도, 가해자를 특정할 증거수집이 조금은 용이했을지도, 회유든 압박을 가해 유포를 막아보려 시도라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피해자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드는 날을 며칠이라도 줄였을지도 모릅니다. 지원 중인 한 피해자가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의 변호사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졌을 때였습니다. 피해를 피해라 말하지 못하게 하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자신이 위험을 자초한 이들에 대한 지원에 대한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상황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 지지를 해야 함을 반증합니다.
사건 진행 과정에 피해자 접근 용이하도록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이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단체들의 상담창구를 통해 변호사들을 만납니다. 사건 진행상황이 다 달라 개입이 쉽지 않습니다. 경찰조사에 동행해 가명조사부터 요구한 경우도 있고, 기소 전 단계에서 검찰에 의견서나 추가 고소장을 제출하기도 합니다. 완료된 조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공개청구를 하기도 합니다. 이미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피해자재판기록열람등사신청을 해 기록을 받아 부랴부랴 의견서나 피해자 탄원서를 제출한 사건도 있습니다. 재판에 대한 비공개 요청도 진행됐습니다. 추가로 피해자조사가 결정된 경우도 있습니다. 증인신문 외의 진술권이 인정된다는 사실을 안내하자 직접 혼자 법정을 찾아 가겠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형사절차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권리’가 피해자에게도 있습니다. 더 안전하게 참여할 권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인 사건의 진행상황을 알 수 있도록, 여러 변호사들이 피해자 변호사로 위임장을 제출하고 피해사실이 제대로 반영된 것인지 사건별로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지원
피해촬영물 삭제 지원이 백방으로 이뤄지고 있고, 효과적 삭제를 위해 추가적인 기술보완이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인정보유출로 인한 불안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주민등록번호 변경 제도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범죄피해자 생계비 학비 의료비 등 경제적 지원 제도의 도움을 받은 분도 계십니다. 개명절차도 밟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는 별개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특수성에 맞는 지원들이 구체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개인 피해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다시 그 피해촬영물을 마주하더라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마음근력이 키워진다면 어떨까요? 범죄피해자를 위한 안전망이 마련된다면 우리 사회가 다시 엔번방 같은 사건을 마주할 때의 모습도 달라져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공감은 텔레그램성착취 공동대책위 피해자지원 변호사단의 일원으로 계속 사건을 지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