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 국기에 대한 경례와 양심의 자유
언젠가 ‘인간의 행동 중 90%이상이 습관적인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90%라는 수치에 놀라며 그것이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적인 반복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이 익숙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편안함 때문에 현재의 삶의 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공감의 8월 월례포럼은 익숙한 것에 대한 불편함을 고민하게 한 자리였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서 들었던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던 기억,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과도한 체벌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느꼈던 기억, ‘다름’이 ‘차이’가 아닌 ‘차별’되고, 이것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기준’이 되었던 또래집단들과 그 집단 속에서 다수와는 다른 소수를 배제하는 것에 묵시적으로 동조하면서 미안함을 느꼈던 기억을 이제와 게워내 보면, 막연하게나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심지어 익숙해진 것들을 고쳐나가기 위해 치룰 변화가 불편할 것을 두려워하여 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회피한 채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체벌을 통해서 얻어질 교육효과에 대한 회의와 그렇게까지 해서 달성해야 할 교육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생을 주체로서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인해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권위만 강조하는 현재의 교육계에 대해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강요되는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국가관 교육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시던 이용석 선생님은 그동안의 나와는 달리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고 계셨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을 하고 계셨다. 이는 본인의 이야기처럼 익숙해진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더욱 불편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익숙한 것이 가진 문제들에 침묵함이 편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분명 “다름”이다. 그러나 그런 “다름”이 “차별의 기준”이 돼서는 아니된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의 공존, 그들에 대한 선택의 자유, 그에 대한 관용은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둠살이를 풍성하게 한다. 나아가 생각건대, 사회적 균형은 모두의 생각이 획일적으로 “균형점”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면서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다름”은 삶의 영역을 그만큼 확장시키고 우리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스스로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학생들에게 다름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질 것을 가르친 이용석 선생님은 정직 3개월과 전보처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체벌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권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세워져야 한다고 믿는 익숙한 선생님과는 너무나 다른 이용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도, 학부모들에게도, 선배 교육자들에게도 불편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해지고, 심지어 편안하다고까지 느껴지게 된 폭력이다. 다른 가치관을 가진 소수에게 관용하지 못하고 다수의 가치관을 강요함에도 모자라 불편한 소수를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주체로서의 시민”이 아닌 “객체로서의 국민”에 대한 맹목적 국가 이데올로기의 강요인지, 이순신 장군이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가 군사정권을 경험하면서 “성웅”이 된 것인지에 대한 가부판단 이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권리와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아가 다를 수 있는 자유의 본질이 현존하는 질서의 핵심 가치를 건드리는 것들에 대하여 다를 권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이 국민의 절대적 다수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나, 민족의 영웅이라 칭송받으며 존경받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익숙해져서 편안해진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고민의 결과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런 변화가 사회 전체나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시도라거나 국지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변화라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삶의 영역들과 삶이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일시적 변화 이후에 찾아올 “익숙했던 과거의 삶”과 그것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서 들여야 할 노력은 경쟁으로 점철 된 오늘날에 있어서 적잖은 낭비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함에 침묵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편해진다면, 혹여나 나의 변화가 내 옆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또는 이러한 시도들이 켜켜이 쌓여 새로움이 익숙해질 수 있다면, 그 때는 침묵을 깨고 오늘의 불편한 익숙함에 대해서 목청껏 소리지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