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 ‘내 안의 인종주의 마주하기’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다.”
아니, 내가 인종주의자라니. 소스라치게 놀라 질겁하며 강력히 아니라한다. 뜬금없는 이 한마디에 불쾌하다 못해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인종주의’라는 말이 불편한 것일까. ‘인종주의자’가 무엇을 뜻하기에 단숨에 ‘아니’라고 부정하게 되는 것일까. 이번 1월 공감 월례포럼에서는 우리가 이 불편한 한 마디에 “난 정말 인종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인지 차분히 그리고 냉철하게 고민해보고자 ‘내 안의 인종주의 마주하기’를 주제로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김현미 교수님과 함께하였다. 1월 14일 저녁, 예상 인원의 두 배가 넘는 월례포럼 참가자 90명이 우리 모두에게 내제된 인종주의를 용기 있게 마주해보고, 현실적인 문제와 해결책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고자 모였다.
김현미 교수님은 우선, 인종주의가 무엇인지, 한국사회의 ‘인종주의’는 어떠한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해주셨다. 인종주의적 사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황인종’ 혹은 ‘아시아인’ 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무시당할까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이나 지하철에서 어두운색의 피부를 가진 외국인 노동자의 옆자리에 선뜻 앉으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재화된 인종차별에 해당한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 특정 인종에 대한 열등감 또는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다. 우리는 성별이나 인종과 같이 생물학적 특징을 기준으로 개인을 범주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칼에 부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인종주의가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는 무관심과 묵인으로 방치되고, 가해자는 나타나지 않는데 외국인 혐오주의, 반다문화주의로 인한 피해자는 늘어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아무도 이를 선뜻 해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고착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주의는 무엇을 근거로 성립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 독이 되고 있는 것일까? ‘인종주의’ 개념은 놀랍게도 19세기에 처음 대두되었고, 사회의 지배 권력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인종의 생물학적 특징을 지능, 범죄성과 같은 사회, 문화적 특징과 연결지었다. 즉, 인종주의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인류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망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무서우리만큼 정교하게 이용되고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다문화 사회와 미디어’라는 수업에서 이와 관련된 영상자료 ‘Race – The Power of Illusion’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각자의 DNA 샘플을 비교 실험한 결과, 범주화된 인종, 즉,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유전자 배열 구조나 서열이 비슷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흑인과 백인 친구의 유전적 구조가 더 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근거 없는’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는 법, 정책, 미디어 등을 통해 인종주의가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조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인종주의 또한 자민족중심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일제식민지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백인 환상’과 ‘입양수출’을 통한 혼혈아 배제에 이르렀다. 미군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정부 정책으로 ‘입양수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혼혈아’ 혹은 ‘외국인처럼’ 생긴 한국인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너 어디서 왔니?’ 가 아니라 ‘어디가, 밥 먹었어?’라 물으며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친구로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함께’ 하면 더없이 좋을 사람들을 ‘타자화’ 하고 남처럼 서먹하게, 서운하게 대하게 된 것일까. 잘못된 정책 하나로 수없이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고, 여전히 수천 명의 ‘겉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친구’가 아닌 ‘적’이 되고 있는 내 안의 인종주의를 마주하면서 안타까움, 답답함, 복잡한 마음이 울렁였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신인종주의와 다문화가족의 범주화를 살펴보면서 ‘내 안의 인종주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유전적 특징을 근거로 한 인종주의 대신 ‘신인종주의’가 이주민의 ‘문화’를 차별의 원인으로 삼아 문화 혐오를 야기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차별, 배제되는 한국 사회의 외국인 혹은 이주민은 ‘다문화’라는 단어로 구분된다. 바로 이 ‘다문화’ -다양한 문화의 평화롭고 동등한 공존-이라 쓰고 이중적 태도 및 편향적 시각으로 읽는 한국의 미디어, 법제, 국가 정책으로 인해 내 안의 인종주의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리소문없이 내재화 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다문화가족을 불쌍하고, 착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집단으로 묘사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 복지에 의존하고,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도둑으로 묘사한다. 소리 없는 폭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김현미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공익광고에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김치 없이 밥을 먹지 않을 만큼’ 애국심에 가득 차고, 지극히 유교적인 가치관을 지닌 인격체로 규정된다. 다문화 가정의 2세라는 이유로 개별 인격, 개성이 존중받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규정짓는 정체성을 부여해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인종주의는 정책에까지 교묘하게 침투해있었다. 현재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정부가 ‘효부상’을 준다고 한다면 누가 받고 싶어 할까. 아니 오히려 여성차별, 비하적인 정책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지금, 2014년의 한국에 이 ‘효부상’이 존재한다. 다문화가정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효부상’은 임의적으로 시/공간적 거리감을 조장하여 이들을 ‘전근대적’ 주체로 만들며, 제3세계 국가에 대한 편견과 문화적 차별을 끊임없이 조장한다.
이처럼 각종 다문화가족 지원 법제와 정책들이 ‘시혜’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다. 이는 ‘다문화’라는 단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선의의 제도, 기업 및 정부의 정책을 밑도 끝도 없이 비판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안의 인종주의 마주하기’처럼 소리 없이 권력화, 낙인화 되고 있는 인종주의적 미디어, 법, 정책들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혜자’로 구분되어 버린 이주민과 외국인들이 주체적으로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정책을 요구하고 그것이 반영되며 피드백까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각기 다른 문화를 스스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주변 사회는 그것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정관념, 갈등과 차별을 양산하는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바이러스는 우리의 의지와 달리 도처에 퍼져있기 때문에 ‘내 안의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강연에서 이를 마주하며 “다문화 감수성”이라는 백신을 맞았다. 법, 미디어, 정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상호적이라면 우리는 역으로 사회구조의 변화에 앞장설 수도 있는 것이다.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내 안의 인종주의를 마주하며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인종’의 개념 없이 ‘다문화’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읽고 정의롭게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공감’하며 희망을 그리자!” 나도 모르게 ‘남’처럼 때론 ‘남보다 못하게’ 생각했던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말이 아닐까.
글_정은정 (18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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