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 성희롱, 왜 문제인가?
더불어 외국 사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미국과 유럽 사례를 비교했을 때, 미국은 법 중심적이고, 노조 힘이 강한 유럽은 노조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법 규제 강도가 우리나라와는 비하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센 미국도 성희롱 관련 법률이 생겨난 이후, 소송 건수가 줄지 않은 것을 보면, 법의 유용성이 정말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홍성수 교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국내 소송 사례를 들으니 법적 대처의 문제점이 좀 더 쉽게 보였습니다. 교장, 교수, 남자 교사 셋, 여자 교사 셋이 있는 자리에서 교감이 여자 교사를 가리키며 교장 선생님께 술을 따르라고 한 경우, 성희롱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쟁점이었는데, 여자 교사 중 한 명은 성희롱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 명은 성희롱까진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교감은 사회적 관습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여교사를 지칭한 건 그들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5년이라는 긴 기간을 끌고 결국 교감의 승소로 마무리됐습니다. 비록 이기긴 했지만, 여기서 진정 교감이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한 건 아닐까요? 홍성수 교수님은 왜 이런 사건이 대법원까지 갔어야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시민 사회 상담소와 같은 관문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물론 관문을 설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된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도 여자 교사는 전교조에 1차 지원 요청을 했지만, 전교조에서 교감과 학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권고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위의 사례에서도 성희롱이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정작 판결에서는 별로 유용하게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관문이 필요한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법으로 대응하려면 맥락, 개인의 감정 등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게 되는데, 특히 미국과 같은 판례 중심이 아닌 우리나라 법 체계에서 수많은 성희롱 건수를 일일이 주관적 요소를 고려하여 판단하려고 한다면, 법적 대응이 시간과 자원만 낭비한 채, 일관적이지도 못하고 피해받은 사람을 제대로 구제하지도 못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성희롱 문제에서 중요한 고려 점은 ‘성희롱 피해를 당한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인데, 홍성수 교수님은 대다수 피해자는 ‘행위의 중단’을 원한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소모적인 법적인 절차를 밟기 이전에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50명 이상의 사업장에서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1년 1회 성희롱 교육과 같은 주입식 교육 방법이 아닌, 진정으로 직장이나 학교 구성원들이 성희롱이 어떤 점이 문제이고, 왜 문제이고, 어떻게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인식을 바꾸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입니다. 자체 규율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이 밖에 상황극을 해보는 것도 실제 미국 듀퐁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성희롱 문제 예방책입니다. 이렇게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때야 비로소 설사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행위의 중단을 유도하거나 요구할 수 있고, 문제 상담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성희롱, 성폭행 등을 다룬 성 관련 법으로만 봤을 때는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인권 선진국’이라고 볼만큼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법이 제대로 적용되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기대는 이제 조금 내려놓고,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시점인지도 모릅니다.
_ 글 조윤현(공감 17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