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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장자연사건을 통해본 여성인권

장자연 사건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놀랐던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여성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글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사건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항상 성차별에 분노하는 것은 소수의 여성뿐일까. 왜 사회는 지겨울 만큼 되풀이되는 이 같은 일을 단지 가십거리로 소비하며 망각하는 걸까. 왜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해져 갈까. 답답했다.

 



 6월 월례포럼에서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본 여성인권’이라는 주제로, 신랄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를 들려준 페미니스트 유지나 교수의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풀어보도록 하자.


 


 


1. 장자연 문건이 가진 의미


 


“저는 나약한 신인배우입니다.”


 


스스로 나약한 신인배우라고 자인하며 주민등록번호와 지장까지 찍은 장자연의 문건은 구조적인 여성연예인 인권유린 실태를 폭로하는 ‘성상납 리스트’를 담고 있다. 그녀의 목숨을 건 용기 덕분에 문건은 유서가 되었고, 한 여성연예인의 진실이라는 ‘힘’을 갖게 되었다. 70여 년 전 ‘여자도 인간이외다’라고 호소한 나혜석을 연상시키는 이 문건은 여성의 인권상황을 사적 차원에서 고발하고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가슴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정숙한 여자가 되지 못한 여자들은 결국에는 나혜석처럼 사회적 타살을 당하거나 장자연처럼 자살을 택한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남았어’라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가 중얼거렸듯이, 고통으로 지친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죽을힘으로, 장자연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극단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사회의 성차별적 관행들은 70년이 지나도 바뀐 것이 없다”고.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2. 집단 최면에 걸린 사회


 


“연예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과의 성관계는 자연스러운 일?”


 


 우리 사회는 집단최면에 걸렸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이자 신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것을 묵인해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이 위선적인 현실 속에 침묵의 카르텔은 형성됐다. 이윤과 권력을 추구하는 모든 정권 혹은 미디어와 무관하지 않았고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사적 영역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진보집단의 남성들도 이 동조의 카르텔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여성의 ‘정치’란 이런 카르텔 속에서 ‘미모로 살아남는 일’이다.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성의 입맛에 따라 여성의 삶이 선택, 결정된다. 연기나 노래와는 별개로 일단 여성연예인들은 섹시해야한다. 남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외모를 고칠 것을 강요받으며, 끊임없이 자기 몸을 전쟁터로 삼는다. 몸의 상처는 마음의 상처로 이어지는 법. 아무리 예뻐지고 유명해지면 뭐하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가엾은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걸레’라는 낙인과 악플 뿐인데……. ‘시각적인 매춘’을 즐기고 강요하는 동시에, 누군가 건드리지 않은 정숙한 여자를 원하는 이중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분열한다. 그리고 사회는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너무나 쉽게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3. 이중성은 연애할 줄 모르는 사회 탓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 거저주고 거저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남성의 성욕을 위해 여성을 억압한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소통은 어려워졌다. 소통의 부재 속에 장자연은 죽었고 ‘현모양처’와 ‘걸레’로 여성을 이분하는 분열적인 섹슈얼리티 관은 남녀관계의 즐거움을 빼앗았다. 겉으로는 연애와 로맨스는 힘들고 귀찮아서 못하겠다고 하면서 온갖 성매매와 성상납을 일삼는 남성들과 이를 관행으로 묵인해온 우리 사회는 이중적이다. 그리고 위선적이다.


 


 유지나 교수는 말한다. ‘차라리 자유롭게 연애하라’고. 돈과 권력이 개입되는 관계가 아니라 진짜 사랑을 하란 얘기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아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사랑의 폭을 넓히자. 그래야 상대를 존중할 수 있고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다. 사회를 해방시키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번 일이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의 성 정치학을 변화시키려면 여성을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인식 대신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남성들이 침묵을 깨는 것이다. 여성들은 서러운 죽음 앞에서 냉소를 버려야 한다.


 


 슬퍼하자. 우리 모두,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나. 힘없는 여성들의 불행에 함께 분노하고 슬퍼해야하는 이유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 모두 그들의 불행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침묵하는 사회에서 아무 힘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자연은 스무 살짜리 후배를 위해 접대를 대신 나갔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화내고 슬퍼하는 것, 그리고 여성연예인인권서포터즈 까페(http://cafe.daum.net/jysupporters)에 가입하고 응원 글을 올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슬픔과 죄책감으로 우린 조금씩 더 소통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_ 9기 인턴 이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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