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포럼] 정신장애인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과 제도의 허점 분석
#미선씨의 정신장애 이야기
아파트에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하여 사건을 원만히 해결되었지만 ,폭행 가해자가 정신장애인이라는 것을 안 입주민이 가해자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신장애인 가족의 집 앞에 몰려가 정신장애인의 ‘강제’입원과 가족의 ‘이사’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더 나아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등을 상대로 강제전출을 요구하는 연명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집단행동으로 입주민들은 결국 정신장애인의 가족으로부터 정신장애인 아들의 병원 치료약속과 위반 시 이사 가겠다는 취지의 각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4개월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정신 장애인을 발견한 이웃은 정신장애인 가족을 꾸준히 괴롭혔다. 이웃들의 집단 따돌림과 악의적인 소문을 견디지 못한 정신장애인 가족은 결국 아파트를 떠났다.
이 사건은 2009년 화성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단면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 장애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국가보고서 「정신 장애인에 대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정신장애인과 관계 맺는 것을 주저한다.
무엇보다 정신장애인을 괴롭히는 것은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다. 정신장애인은 이유 없이 칼부림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악의 축이 아니다. 여의도 칼부림 사건이나, 연쇄 살인사건으로 보듯 공격적 행동을 정신장애인의 소행으로 치부하지만 실제로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일반인과 비슷하거나 더 낮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정신보건법 제2조는 정신질환을 이유로 정신 장애인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정신 질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2012년 8월 17일 열린 공감 월례포럼은 정신 질환자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 그리고 정신 장애인을 차별하는 실태와 제도적 허점을 탐구했다. 1부는 한국정신장애인연대 (Korea Alliance on Mental Illness) 활동가(약칭 카미)이자 실제 정신장애를 앓는 박미선 씨의 경험담으로, 2부는 아주대학교 정신과 이영문 교수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정신분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박미선 씨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정신분열 증상인 환각, 망상적 사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선 씨의 근면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모습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러나 미선 씨에게도 차별과 편견은 언제나 그녀의 삶의 무게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미선씨는 같은 병원에서 4번 진단받았지만, 4번 다 다른 병명을 얻고, 수십 년간의 치료, 입원, 심지어 강박까지 대한민국 정신병원을 몸소 겪으며 본인의 소명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녀가 싸운 것은, 이 사회의 정신장애에 대한 무지와 무식한 폭력이며 열악한 사회제도였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 시설에서 생활한 뒤 고등학교를 강남 8학군으로 진학하게 됐는데, 그때 경험한 주변 사람들의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거기는 성적을 받기 위한 경쟁만 할 뿐…, 친구 간 우정이라고는 없고…, 정신장애인으로 저를 외면만 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버지의 폭행은 이어지고….”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동안 정신 장애를 갖고 살아가면서 감내해야 했던 내적?외적 고통이 적잖았지만, 좋은 환경과 친구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담쟁이같이 서로 의지하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사회로 복귀한 지 1년 만에 정신병원에 재입원했다.
미선씨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보호감호소도 아니지만, 병원에서는 군대와 같이 미선씨의 모든 행동을 통제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도 금지했다. 화장실조차 본인 의지대로 갈 수 없도록 병원은 미선씨의 신체 및 이동의 자유조차 박탈했다. 정신병원에서 인권침해는 일상이었다. 아무 병이 없는 사람도 타의적으로 감금되었다.
실제로 정신 질환자의 의사를 배제한 채, 보호자와 정신과 의사의 동의만 있으면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제도 때문이었다. 또 정신병원의 시설자체가 정작 정신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어떤 조치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 수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고 약을 먹는 등 규칙적인 생활 자체가 재활의 한 과정이다. 정신병원시설에서는 환자들에게 이런 규칙을 지키도록 하며, 환자들이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생활이 정신장애인의 사회 복귀를 전혀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장애인은 사회 복귀 후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정신병원을 강제입원이 아닌, 본인 동의 입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그 규모도 적다. 오히려 지역사회의 프로그램과 병원과 결부하여 사회에서 치료를 받고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됐다. 한국의 시스템이 관리와 통제 중심의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라면, 선진국의 시스템은 개인의 상황과 여건을 세밀하게 고려한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라 할 수 있다. 병동의 규모를 줄이고 축소하는 탈원화를 거쳐 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여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로 나아가야 한다.
미선씨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정신병원 생활도 참담하지만, 가장 무섭고 터무니없는 것은 그녀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회의 적대적 태도였다. 정신질환자 또한 엄연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존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동체 발전에 얼마든지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다수의 일반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공동체의 발전은 ‘아픈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신질환의 특성을 이해하고, 정신장애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배제한 채, 무조건 차별하고 거부하는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 다수의 일반인이 일시적 정신질환을 앓을 확률이 매우 높은 걸 감안하면 이런 처사는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정신장애인이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갖고 있는 권리에 대한 침해이다.
#철저하게 빈틈 있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제도
이영문 교수는 박미선 씨에 이어 정신장애인 차별 현상을 제도적 측면으로 일부 언급했다. 정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그 사회의 정신건강을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정신건강으로부터 모든 사회적 현상이 수렴되기 때문에, 차별이 심할수록 사회에서 상호간 관계의 배타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 장애인에 대한 차별 문제를 풀고자 차별의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개진해야 한다.
그동안 국가는 정신장애를 공급자 편의 중심 체계로 관리했다. 국가는 국가의 비용이 적게 들게 하고자 책임을 사회화하고 이익을 사유화하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체제를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정신장애를 다루는 병원은 개인병원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양심 있는 병원들은 문을 닫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 정신보건 시설 중 민간시설이 80%나 되는 것만 봐도 정신장애인이 국가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 즉 사립병원에서는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환자는 곧 돈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정작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보다는, 병원에 이익이 되는 치료를 처방하기 일쑤였다. 국가는 병원 내 인권유린을 방관하고 세금만 집행할 뿐이다. 앞서 말한 본인 동의 없이 강행되는 부당한 입원 절차 제도와 입원 후 인권침해 등은 모두 사립병원의 방만한 경영과 환자의 인권유린을 가속하는 제도적 허점이다.
따라서 정신장애인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의 노력과 함께 의료진, 그리고 일반 대중의 노력이 촉구된다. 독일의 경우 나치를 겪으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일반인의 기본적인 권리도 언젠가 제한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장애인이 일반사람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독일을 리모델링했다. 또한, 병동에 감금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이 적절히 적응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보완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독일 국민의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에서 시작했다. 정신장애는 멀리하고 격리해야 하는 몹쓸 병이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감기 같은 것이고, 정신장애인은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은 그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정신장애를 의미하는 ‘mental disorder’는 의사의 진단으로만 판정되지만, 정신장애 진단을 받지 않고도 정신 질환을 의미하는 ‘mental illness’는 누구나 일시적으로 겪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 질환자란 정신장애를 겪는 환자뿐 아니라 모두일 수 있다. 정신질환을 기준으로 normal, abnormal을 구분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비합리적이다. 무지의 소치이며, 폭력이다.
이영문 교수는 정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줄이기 위해 우선 정신병의 ‘public awareness’ (대중적 인식)를 증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태까지 정신병을 감지하는 ‘detection'(발견)만이 선행되었다면 이제는 진정한 인식개선을 위해 대중의 정신건강 의식도 높일 필요가 있다. 독일의 모델처럼 말이다. 대중이 정신 장애와 정신 질환, 이 두 가지를 구분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인식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장애를 겪는 사람과 대화하고 생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인식으로의 변화는 정신 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에도 도움이 된다. 시설 생활이 고통스럽고 군대처럼 규칙적이어서 많은 정신장애인들은 퇴원 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하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미선씨는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오는 사회적 낙인은 이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정신장애인이 되는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억 광년의 은하가 생긴다.
정신장애인이 이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보장도, 대접도, 차별과 편견에 대한 고언도 아니다. 단 하루라도, 같은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허락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하는 길이다.
15기_박서현
#외계인을 바라보는 정신장애 인식
나는 외계인이었다. 내가 심한 우울증을 겪을 때 사람들은 나를 외계인 보듯 하였다. 하루 18시간을 자거나 무기력하게 지냈고 가슴에 돌이 박힌 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여러 정신과 상담과 다양한 약물치료를 받아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떤 약은 먹으면 몸이 축 늘어졌고, 일상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식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하고, 돌출된 행동을 하거나 울적이고 있으면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부모도 사춘기라 그러려니 했고, 교사도 친구도 저러다 말겠지 하며 나를 따돌렸다. 내가 유일하게 존재감을 느낀 것은, 내가 죽으려고 옥상에 올라갈 때였다. 사람들이 나를 봐줄 때 그때만이라도 나는 내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자살로도 자기 존재를 입증하기 힘든 사회가 됐다.
우울증은 정신병이고, 또한 광의적 의미에서 정신장애이다.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장애는 복구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신장애는 장애와 일시적 질병이라는 명확한 구분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일반인은 가벼운 우울증을 앓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정신장애와 동치된 인식을 한기도 한다. 또 우울증이나 정신분열 환자를 포함한 정신장애인에게 비정상적이고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한다.
내가 외계인이었을 때 그들이 보기에 나는 많이 이상하고 확실히 충동적이며, 우울하고, 불순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싸이코였다. 친구도 부모도 도외시한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종교였다. 영혼의 마지막 보루인 종교에 기대어 위로 받고 싶었지만, 나를 감정기복이 많아 귀신들린 정신병자라 다그칠 뿐이었다. 예수님마저도 나를 외계인 보듯 하신 걸까.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기계화된 문명에서 인간도 톱니바퀴처럼 째깍째깍 오와 열을 맞춰 굴러간다. 기계에 빨려 들어간 찰리 채플린처럼 삭막하고 경쟁과 집단주의가 맹종되는 세태에는 개인의 생각과 사상의 자유란 없다. 그래서 아프다.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 못해서 아프고, 아플 힘도 없어 아프다. 누군가 조금 돌출된 행동을 할 때, 적당히(?) 적응하지 못하는 불순분자를 정신병자로, 외계인으로 낙인찍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당당하게 입증 된다. 나는 저러지 않으니까 정상이지, 나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거야 하는 피아의 이분법적 인식구분은 정작 자신을 피해자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나 강박 증세가 있을 수 있고, 일시적인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은 스트레스를 가중하고 정작 치료할 시기를 놓쳐 자신마저 ‘비정상’으로 추락하는 치명적인 모순을 야기할 수 있다.
또 정신장애에 대한 낙인은 흡사 매카시즘과 닮았다. 매카시즘은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의회에서 공산주의 관련 인사를 축출하고자 명부를 작성한데서 유래한다. 이와 유사하게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정상적인 인식’도 정상인이 아닌 사람을 비정상인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정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으로 비정상인의 조짐이 보이는 것들은 모두 터부시한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 한 가지, 순수한 ‘정상인’은 과연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일까?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한 건 미국의 공산화에 대한 공포였다.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도 실은 공포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정신장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바라보는 그 내면에는 정신장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2차원에 사는 존재는 3차원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3차원을 1차원이라고 아등바등 우긴다. 정신장애인과 직접 접하기도 전에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의 굴레에서 위험하고 불순한 사람이라 단정 짓는다. 정신장애를 겪어보지 못했을 때 혹은 얼핏 들은 왜곡된 정보로 손쉽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도 우울증과 정신분열을 겪었지만 내가 가장 아플 시절 내가 가장 증오하고 미워한 것은 친구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며 나 자신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등 특이한 행동은 해도 위험하지 않았다.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은 위험한 존재가 아니고 영원히 치료될 수 없는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적절한 관리와 관심이 필요하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정신장애의 일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력한 증오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법은 주변에 대한 관심과 의미 있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고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익숙한 것에 친하고 낯선 것에 서툴다. 하지만 낯선 것과 대면하며 인간은 발전했다. 물론 우리에게 아직은 정신장애인보다 외계인이 더 익숙할 것이다. 나를 외계인처럼 바라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몸을 파는 여성을 질타하는 바리새인을 꾸짖으며 죄가 없는 자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우리가 외계인으로 여기는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정말 아프지 않은 자, 돌을 던지자.
15기_한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