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과 함께 ‘사람’이 다가왔고, 단지 그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2 _황필규 변호사
2015년 메르스 사태 : 닫힌 사회의 갇힌 이들, ‘격리‘된 이들을 찾아서
순식간이었습니다. 2015년 5월 20일 메르스의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메르스 감염의 공포도 공포였지만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격리자’들이었습니다. 거의 한 달 안에 자가 격리 혹은 병원 격리된 이들이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격리자는 본인들의 잘못이 전혀 없이 전**에 노출된 피해자로 감금을 통해 가정, 직장, 사회생활 모두가 급작스럽게 중단되어 그 누구보다도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국가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심리적,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어 숨죽인 채 오열할 수밖에 없는 가장 취약한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격리자는 감**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킬 위험이 있는 최악의 죄인,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대한변협 생명안전특위(전 세월호 피해대책 TF)를 통해 격리피해자 몇 분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고, 격리 관련 법제와 관행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대한변협 인권보고서에 게재하고 관련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메르스 격리는 그 법적 근거조차 불분명했고, 법률에 추상적으로 규정된 격리의 요건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생계 지원, 심리 지원 등 몇몇 격리자 지원 조치들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다보면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 출입 기자들을 교육할 기회를 가지고 기자단체에서 발표할 기회를 가지면서 격리의 문제점이 기사화되고 일부 법제의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격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의료계에서 격리자들 인권침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2016년 가습기살균제 참사 : 끝이 보이지 않는 참사, 국제적 대응을 꾀하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그 규모와 기간의 측면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입니다. 2017년 환경부 연구용역에 의하더라도 가습기살균제 사용자가 350~500만명에 이른다고 하고 30~50만명이 건강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제품이 출시된 1994년에서 판매가 중단된 2011년까지 17년간 보이지 않는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잠잠해졌던 가습기살균제 이슈가 2015년 말을 기점으로 검찰의 본격적 수사에 힘입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함께하는 단체들과 변호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분들을 지원하는 한 단체 대표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옥시 본사 RB가 있는 영국에서 소송을 진행하고자 하는데 자문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면서 다국적기업의 본국에서의 소송가능성을 연구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자문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영국변호사들과도 긴밀히 협의하며 소송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유엔에 추가진정을 제기하고, 옥시 본사 RB의 투자자인 네덜란드 연기금 윤리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고, 외국 소재 자회사의 부정부패 혹은 뇌물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영국의 특별검찰인 중대사기수사국에 고발장을 접수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분들과 만남을 가지면서도 세월호 참사 때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오던 두 가지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거의 모든 집단재난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분열합니다. 전혀 다른 경험과 인식을 가진 이들은 의견일치를 보기 어렵고,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인식과 의견을 불일치는 곧바로 적대적인 관계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등관계에 있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분들을 만나며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사회적 참사, 인적 재난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간 극단적인 힘의 불균형이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옥시의 경우, 영국 본사와 국내 회사의 최고경영자들, 대형로펌 변호사들, 위기관리 자문회사들이 총동원된 전략회의를 매일 하며 대응을 모색했습니다. 반면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소수가 모여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그때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의를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변호사의 자문이 이러한 상황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2017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건 : 변하지 않는 재난 대응, 변화를 외치다
2017년 3월 31일 남대서양에서 운항 중이던 화물선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하여 총 24명 선원(한국인 8명, 필리핀인 16명) 중 필리핀 선원 2명만이 구조되고 22명은 실종되었습니다. 5월초 선사가 제공하던 공간에서 쫓겨난 피해가족들은 정부와 선사의 수색 종료 통보 이후 청운동, 광화문 등지에서 일인시위, 기자회견 등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피해가족들의 요청이 들어와 대한변협 생명안전특위 차원의 법률지원이 결정되어 주로 제가 피해가족들이 있는 현장에 함께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피해가족단체 내 갈등해결을 위한 자문이 이루어졌습니다. 청와대, 외교부, 해수부, 부산해경 등 정부 관계자들과 수차례의 만남을 갖고 정부의 원칙과 방침, 그것을 시행하기 위한 계획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일부 수색 선박이 단기간이지만 추가 투입되었고, 주변 섬 수색이 이루어졌습니다. 구명벌 발견 보고를 했던 미국 초계기 측이 보유한 정보 요청이 이루어졌고, 심해수색장비 투입에 논의가 시작되는 등 일부 성과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정부의 자체 계획에 의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고 피해가족들이 길거리 서명에 나서고 언론에 호소하고 국회를 들락거리고 난 후에야 조금씩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가족이 실종된 아픔 외에는 그 어떠한 추가적인 상처나 아픔에도 피해가족들을 노출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바램을 조금이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장을 지켜야 했지만 충분히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2018년, 다시 재난, 사회적 참사 속으로
2017년 11월 24일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 특별법은 416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발생 원인, 수습 과정, 후속 조치 등 사실관계와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점검하고 안전 관련 법제와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법입니다. 법 통과 전날부터 법안의 마지막 협상을 자문하며 국회에서 밤을 샜습니다. 세월호 가족분들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다고. 사회적 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 규명, 피해자 중심의 재난대응 시스템 마련을 이루기 위해 이 특별법상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결합했습니다. 대한변협 생명안전특위에서는 간사 역할을 하며 재난대응 법률지원 매뉴얼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018년, 다시 또 다른 재난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재난과 함께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지 그 ‘곁‘에 있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제가 ‘공감’ 변호사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비영리로 운영되는 공감의 상근 변호사이기에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인권의 관점에서 재난을 바라보고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각자 맡은 인권 영역이 존재하지만 기존 영역이 아니더라도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공감의 지향이 있었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로 달려간 것은 출장으로, 오랜 기간 안산에서의 상주는 파견으로 이해해 준 공감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비록 안산으로 출퇴근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재난과 관련된 활동이 저의 전체 활동에 20%를 넘은 적은 없지만, 재난과 인권의 영역이 공감이 다루어야 하는 인권 영역인지를 함께 고민해 준 공감 구성원들의 따뜻한 진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저의 활동을 묵묵히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신 후원자분들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늘 두렵지만 다시 용기를 가져봅니다.
글 _ 황필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