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위헌소원 변론기 2
1편에 계속
선택
법리 구성에 있어 대리인단이 오래 토론했던 것은 낙태죄로 인하여 ‘제한되는 기본권’으로 ‘재생산권’을 쓸 것인가였습니다. 공감은 2013년 낙태죄로 기소된 여성을 항소심에서 변호하면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같이 했는데, 그때는 토론 끝에 한국에서, 특히 법학계나 법원에서, ‘재생산권’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다고 보아 재생산권 개념 대신 자기결정권, 신체의 완전성에 관한 권리, 평등권 등의 기본권으로 나누어 구성했었습니다. 변론 준비 과정에서 한국과 외국에서 나온 중요한 ‘재생산권’ 문헌을 정리하고 검토하면서 변론요지서의 구성을 정할 때까지 이 문제를 숙고했습니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이라고 해서 경시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분명히 두고 있기는 합니다.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정되려면, 기본권의 내용이 명확하고 보장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는데, 2017년에도 여전히 ‘재생산권’ 또는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성과 재생산의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성숙하지 않았다고 대리인단에서는 판단했습니다, ‘제한되는 기본권’으로 재생산권을 쓰는 대신에, 국제적으로 논의되는 재생산권의 내용을 우리 헌법이 알고 있는 자기결정권, 건강권,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침해, 모성보호를 받을 권리, 평등권에 나누어 쓰기로 하고, 기본권별로 다시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낙태죄’ 조항이 오히려 여성의 모성보호를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낙태죄’ 조항이 갖는 평등권 침해의 결과를 논증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공개 변론에서 진술할 참고인으로 누구를 추천할 것인가 것도 대리인단의 변론에서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2018년 3월 드디어 헌법재판소에서 공개변론을 열기로 결정하고 대리인단에 청구인 쪽의 참고인을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헌법, 형법, 국제인권법, 법사회학 등 법학 분야의 저명한 교수님들 중에서 저희의 변론 방향과 일치하면서 ‘낙태’ 문제에 관한 독자적인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피력해 주실 분들을 찾았습니다. 고심 끝에 우리의 변론을 법이론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학자 대신 임신과 ‘낙태’의 현실을 의료 현장에서 경험하고 여성을 만난 분, 헌법재판소 재판관께서 잘 알기 어려우나 위헌심사시 고려되기를 바라는 정보를 진술할 수 있는 분을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청구인 대리인단이 추천한 산부인과 전문의 고경심 선생님은 대리인단의 변론에서 부족할 수 있는 부분을 200% 보완하시면서 전문가 진술에 임하셨는데, 이 결정은 헌재 변론 과정에서 대리인단이 한 결정 중 가장 잘 한 것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이번 변론에서 자기결정권 외에 안전한 임신중단 접근권이라는 의미에서의 건강권이 쟁점으로 꼭 다루어지기를 바랐는데 그런 방향에서도 잘 맞았습니다.
변론
몇 달 간의 준비를 거쳐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변론요지서를 대리인단 전원이 분담하여 쓰기 시작했습니다. 낙태죄와 같이 극명하게 견해가 대립되는 헌법재판 사건 변론을 참고하여, 통상의 위헌 주장 외에도 위헌결정시 제기되는 우려들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앞서 쓴 것처럼 여성의 임신과 임신 중단의 경험과 국제인권규범과 비교법적 검토 결과도 모두 담으며, 대리인단이 제시한 위헌 논거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인용한 자료의 출처를 논문 각주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고 모든 참고자료의 목록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8년 5월 공개변론에서, 대리인단은 ‘이 사건의 여러 헌법적 쟁점을 심리하면서 그 출발점을 여성의 경험과 현실로 삼아주시기를 바랍니다’를 첫 문장으로 하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출산조차도 선택하지 못하고 딸을 임신했다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당하고, 인구조절을 위한 국가 정책 속에서, ‘임신의 유지든 낙태든 여성은 스스로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아 왔음’을 지적하고, ‘임신과 출산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한 성평등한 사회의 구현은 불가능합니다. 헌법재판소는 더 이상 이런 위헌적 상황을 외면하여서는 안됩니다’로 변론을 마쳤습니다.
헌법불합치결정 선고
공개변론 이후에도 ‘낙태’ 이슈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는 계속 진전되었습니다. 대리인단은 공개변론 이후에도 선고 직전까지 유엔의 ‘법과 실제에 있어 여성차별 문제에 관한 실무그룹’이 헌법재판소에 이 사건에 관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고,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발표한 최신의 ‘생명의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36호), 국제 안전한 낙태의 날에 발표된 유엔 전문가의 성명의 내용 등을 의견서로 제출했습니다.
국내에서는 공개변론 전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많은 여성들이 임신과 낙태에 관해서 발언하고 연구자들의 연구와 담론, 재생산권 운동이 선고시까지 폭발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발언과 운동이 헌법재판소의 담장을 넘었고, 낙태죄 헌법불합치결정은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말하기에 대해서 헌법규범의 최고 판단기관인 헌법재판소가 내놓은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법재판소가 결정에서 전제한 것처럼, ‘낙태’의 허용 여부에 대한 생각은 종교관, 윤리관, 가치관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고 각자의 생각은 존중받아야 하며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국가의 법규범에 따른 판단을 한 것이니, 종교와 분리된 헌법규범이 있는 국가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실제적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앞으로 입법의 장에서 한 단계 진전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글 _ 차혜령 변호사
※ 헌법재판소 결정문 정본이 대리인단에 송달되지 않아 결정의 자세한 내용은 결정문 정본을 송달받은 후 공감 뉴스레터 ‘공감 포커스’에서 다룹니다.
공감의 관련 활동
2013 인구보건복지협회 ‘성폭력 피해자 인공임신중절 지원방안’ 전문가 조사
2013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낙태 규제 법제에 대한 입법평가 자문
2013~2014 낙태로 기소된 여성 공동변호인단(무죄 변론,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 결과: 벌금 200만원 유죄 판결이 상고 포기로 확정됨,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은 기각됨)
2013. 11. 7. ‘낙태죄’ 관련 법 개정을 위한 연속 포럼 공동 개최
연속 포럼 1회 <모자보건법상의 ‘배우자 동의’ 항목의 현실>
2014. 5. 14. 연속 포럼 2회 <‘낙태’ 처벌, 왜 위헌인가-‘낙태’로 기소된 여성 변론과 위헌 주장의 전략>
2017 한국여성변호사회 주최 모자보건법 제14조 해석과 개정방안 토론회 발표
2017~ 낙태죄 위헌소원 공동대리인단(2019. 4. 11. 헌법불합치결정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