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 –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을 위한 연대 활동
80년 오월의 광주를 다룬 드라마가 있습니다. 현재 KBS 2TV에서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오월의 청춘>입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의뢰를 받고, 이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장 스태프들의 계약서를 검토했습니다. 제작사와 현장 스태프 간에 작성된 계약서입니다. 계약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근무시간, 휴게시간, 이동시간입니다.
“촬영시간은 주 68시간을 준수한다.”
“일 근무시간 16시간(휴게시간 2시간 포함)에 대한 기준은 촬영장 집합시간으로부터 촬영 종료시점까지로 한다.”
과거에는 방송업이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시간 노동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결국 과도하게 많은 일을 하던 이한빛 PD(TVN 신입 조연출)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전 제작 형태로 제작 환경을 바꾸면 장시간 노동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었고, 현재는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의 노동시간도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법과 현실은 여전히 괴리되고 있습니다. <오월의 청춘> 계약서의 문구대로라면 이 드라마 제작 현장의 스태프들은 이틀 치 일을 하루에 다 소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쉬는 날 없이 매일 10시간 일을 해야 하는 셈입니다.
이동시간도 문제입니다. 계약서는 이동시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촬영장에 집합해서 촬영을 종료할 때까지의 시간, 즉 촬영시간만 근무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방 촬영의 경우에는 촬영 전 날 미리 출발해서 촬영지에서 숙박해야 합니다. 미리 출발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드라마는 순천, 광주 등지에서 촬영되고 있습니다. 이동시간까지 감안하면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은 근무시간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근무시간을 제작사측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점, 휴게시간이 8시간밖에 안 되는 점도 문제입니다. KBS별관에 도착해서 다음 날 KBS별관에서 출발할 때까지 8시간의 휴게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자정에 여의도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다시 여의도로 집합하려면 잠을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제작사는 왜 이렇게 근로기준법에 반하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을 법상 근로자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이 노동자가 아니게 되면, 이들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고, 따라서 근무시간, 휴게시간, 이동시간에 아무런 제한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회피할 목적으로 제작사측에서 의도적으로 현장 스태프들을 프리랜서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2019. 7. 고용노동부는 “현장 스태프들이 체결한 계약은 형식적으로는 업무 위탁 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근로계약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만 감독급 스태프들은 근로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법원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하는 감독급 스태프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장이 사원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고 해서 사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장 위에 있는 실질적인 사용자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종속적인 관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실제 일을 총괄하고 최종적으로 지시하는 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계약서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오월의 청춘> 촬영장소와 근무시간은 제작사측이 결정하고, 감독급을 포함한 스태프들은 제작사가 정하는 일정 및 방식에 따라야 합니다. 스태프들은 제작사의 동의 없이는 다른 일을 할 수 없고, 때마다 업무 보고도 해야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제작사와 스태프들은 종속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작사에만 책임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월의 청춘>은 KBS가 방영하는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연출과 촬영감독은 모두 KBS의 정규 직원들입니다. 제작사는 따로 있지만 전체 연출과 제작 현장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KBS가 직접 담당하며, 제작 현장 스태프들은 KBS 직원들과 함께 근무를 합니다.
KBS의 <방송제작 가이드라인>(2020)은 “KBS를 통해 방송되는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최종 책임은 KBS에 있다. 따라서 KBS에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는 외주 제작사와 KBS의 외부 제작요원들은 KBS의 방송제작에 관한 원칙과 기준을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이에 따라야 한다. KBS 제작자는 이들을 관리, 감독하는 책임을 진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이드라인은 “KBS의 외주제작 담당 프로듀서(KBS의 직원)가 ① KBS를 대표하여 외주 제작을 지휘, 감독하는 책임을 지며, ②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편성을 고려하여 제작을 추진하며, ③ 프로그램 기획, 아이템 및 출연자 선정, 촬영 및 녹화, 종합 편집 등 제작의 전 과정을 지원하고 감독하며, ④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와 완성된 프로그램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지적하고 개선시킬 수 있어야”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외주제작사에 대해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KBS의 담당자에게 연락해 필요한 조치를 ‘지시’ 받는 등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외부 제작요원에 대해서는 “KBS 제작자가 방송제작에 관계하는 외부 제작요원(프리랜서 및 계약직 사원)을 지휘, 감독할 책임을 갖는다. 외부 제작요원은 방송제작 활동 중에 KBS의 제작자와 마찬가지로 품위를 유지하고, 문제가 생기면 KBS의 제작자와 상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을 관리, 감독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KBS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드라마제작현장의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위해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2019년 4월부터 지상파 3사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와 4자협의체를 구성하고 논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근로계약서를 쓴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공감은 <오월의 청춘>뿐만 아니라 여러 드라마들의 스태프 계약서를 검토하고 법률 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 스태프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공감도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