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 시드니 : ‘강제이주 성소수자 포럼’ 출장기
작년 9월, 호주 ‘강제이주된 사람들의 네트워크(Forcibly Displaced People Network, 약칭 ‘FDPN’)의 창립자인 Tina Dixon으로부터 한 통의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성소수자난민 당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포럼을 기획하고 있으니, 포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고 또 듣고 싶은지 제안서를 내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성소수자난민’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공감에서 일을 시작한 2017년이었습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본국에서 박해를 받고 한국까지 와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1년에 1프로도 안 되는 인정률을 뚫고 난민으로 인정되기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공감하는 활동가, 변호사들이 함께 개선방향을 고민해 보자고 만나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소수자난민네트워크’입니다.
6년간 네트워크 활동과 개별사건 지원을 하면서 들었던 고민, 특히 한국성소수자난민심사과정의 문제점과 외국인보호소 내 성소수자 처우개선과 관련된 발제 제안서를 제출했고 약 두 달 후 발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답변과 함께 포럼참가비와 출장비를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세계 최대 성소수자 축제인 마르디그라(MARDI GRAS)가 한창이던 2월 21일 호주 시드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와,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무지개일 수 있을까요?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대중교통(트램과 버스), 상점, 광고판, 건물, 길가의 깃발들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지개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막판 발표 준비를 마무리한 뒤 대망의 포럼에 참석하였습니다.
‘Queer Displacement(성소수자 강제이주)’ 포럼은 앞서 설명한 ‘강제이주된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포럼아시아재단’, ‘서시드대학’과 함께 개최한 것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성소수자이주난민을 다루는 최초이자 유일한 포럼입니다. 호주의 활동가가 주를 이루었고, 스리랑카, 네팔, 태국, 뉴질랜드, 체코, 캐나다, 멕시코, 한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Leadership, Partnership and Belonging(리더쉽, 협력, 소속) 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강제이주경험이 있는 활동가그룹이 본인들의 경험을 엮어낸 책을 발표하고, 성소수자난민 작가, 성소수자원주민이자 이주민과의 토크, 성소수자난민당사자이면서 성소수자난민을 위한 단체 대표의 발표 등 다양한 메인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 ‘구금과 성소수자이주난민’, ‘사회소속’, ‘옹호활동’,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성소수자이주’, ‘기후난민, 인터섹스 등 교차성’, ‘성소수자난민의 보건건강’, ‘성소수자난민과 사법’ 등 세부적인 주제로 각 발제자의 국가의 경험과 실무례를 들을 수 있는 본격적인 개별 세션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첫날 ‘구금과 성소수자이주난민’이라는 세션에서 성소수자난민이 외국인보호소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 한국 난민심사체계의 구조적 문제점, 외국인보호소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보호소 내 성소수자난민의 처우에 대해 상세하게 발표했습니다. 함께 발제를 한 호주의 Asyum Seeker Resource Centre의 Michaela Rhode는 지금 현재에도 1,500명 이상의 외국인이 구금기한의 상한이 없는 외국인 보호소에서 평균 680일 이상 머무르다 강제송환되거나 자발적으로 귀국하는 호주의 상황을 공유해주었습니다. 전반적인 상황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성소수자의 경우 어떤 구금시설에 수용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입소 5일 내에 취약성 심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호주 내무부 지침은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둘째 날에는 가장 기대했던 ‘성소수자난민과 사법’ 세션에서 호주 변호사들의 성공적인 성소수자난민 지원 사례 경험을 듣고 고민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최근 호주법원 판결문(BFH16 v Minister for Immigration and Border Protection [2020] FCAFC 54)의 ‘Common Human Experience Principle(보통의 인간 경험)’ 원칙은 난민심사관이나 법관 등 의사결정권자가 자신이 노출되어온 일반적인 경험 범위를 벗어나는 상황을 평가해야 하는 경우 뒷받침할 증거 없이 자신의 가정에 근거한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입증 없이 가정에 기반을 둔 주장과 판단이 난무하는 한국의 난민 재판에서 바로 인용해 볼 예정입니다.
이번 포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성소수자난민 당사자들의 활약이었습니다. 이 포럼을 주최한 FDPN의 대표도, 아프간-터키 난민들을 위한 단체를 창립한 활동가도, 호주에서의 성소수자난민 실태조사를 주도한 연구자도, 자신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한 랩퍼, 시인들도 모두 당사자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체류’가 안정되지 않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어떠한 활동도 하기 어려운 한국의 성소수자난민들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포럼 참가 전날인 2023년 2월 21일, 한국에서는 최초로 동성배우자의 권리와 법적 지위를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현장에 없어 아쉬웠지만 이번 포럼에서 발표 마지막에 승소소식을 전했고 모두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성소수자인권과 관련하여 한국이 가까스로 내딛은 한발자국이 너무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성소수자 축제기간을 맞아 공공기관까지 모두 다 무지개로 물든 호주, 수십 명의 성소수자난민활동가들이 안정적인 체류를 기반으로 더 섬세한 정책을 논의하는 호주를 보며 아직 갈 길이 멀다 생각합니다. 성소수자 영역으로서도, 성소수자 난민 영역으로서도 아직 한국이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을 보고 왔습니다. 조금은 느린 걸음이겠지만 결국 역사적 흐름은 한 방향을 향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길에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
※ 소수자난민네트워크는 2017년부터 2023년 지금까지 꾸준히 회의를 하며 연구, 판례를 분석, 가이드북 발간, 개별 사례 지원, 교육활동, 각종 영화제나 문화제 참가를 통해 성소수자난민의 존재를 알리고 난민심사 개선안을 제안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