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아름다웠던 159개의 우주가 사라진 그날, 그곳에 우리는 여전히 서있습니다 : 10.29이태원참사진상규명특별법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통과에 부쳐
지난 4월,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은 진실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의 국민동원청원을 촉구하며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단 열흘만에 5만 명이 서명한 국민동의청원이 접수되었고, 4월 20일 183명의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공동발의하였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워 더욱 슬펐던 봄날, 가족들은 처음으로 기대감에 부풀었고 금방이라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유가족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진설명] 왼쪽 / 진실버스에 탑승중인 유가족들, 오른쪽 / 10.29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 감사 웹자보 (사진출처 :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숙려기간이 한참 지난 6월 7일까지 10.29이태원참사진상규명특별법은 소관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안건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회는 지지부진했고 가족들은 집회, 시위, 추모문화제, 집중행동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가족들의 목소리가 국회에는 들리지 않는 듯 했습니다. 결국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가족들은 국회 앞에 농성장을 차리고 6월 20일 단식농성에 돌입했으며, 서울광장 분향소부터 국회까지 매일 #159km릴레이행진을 진행했습니다. 유가족 두 분은 단식농성에 돌입하기 전 159km행진보다 단식이 나을거라고 하시며 다른 가족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곡기를 끊는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모든 행동과 삶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결의가 어떤 것인지 가족들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날, 다른 가족들은 단식을 시작하는 두 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우셨고 늦게까지 농성장을 함께 지켰습니다. 어머니가 단식을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10월 29일을 딸을 잃고 다음 날부터 2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해 10kg가 넘게 빠졌었습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습니다. 진실만 규명될 수 있다면 자식 잃은 엄마가 못 할 일은 없습니다.”
[사진설명] 시계방향으로 – 왼쪽 / 10.29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촉구 159km 릴레이시민행진 웹자보, 릴레이시민행진중인 유가족과 시민들1, 릴레이시민행진중인 유가족과 시민들2, 단식농성을 시작한 유가족 두 분, 단식농성 시작 기자회견 (사진출처 :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유가족과 시민 1,029명은 동조단식과 행진으로 뜻을 모았고, 6월 30일 법안이 본회의에서 신속처리안건(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본회의 표결 직전까지 가족들은 서로 손잡고 기도하며 표결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당일 현장에 참석하지 못해 국회 생중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속으로 제발, 제발….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신속처리안건이 지정되자 가족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눈물을 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애처롭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특별법이 통과된 것도 아니고,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한 것도 아니고,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었을 뿐인데,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도하던 그 장면은 2023년에도 여전히 재난 참사에서 피해자는 쉽게 잊혀지고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진척없이 두 달이 지났고, 가족들은 행안위 통과를 촉구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재난의 일상화의 다른 이름인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가 선포되었고, 또 다른 참사를 마주해야만 했던 여름, 가족들은 생명과 안전을 외치며 삼보일배(三步一拜) 행진을 했습니다.
삼보일배는 원래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1보에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2보에 속세에 더럽혀진 진심(塵心)을 멸하고, 3보에 치심(恥心)을 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맹세라고 합니다. 가족들의 삼보일배는 국회를 향한 간절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삼보일배의 의미를 되새겨보니 가족들의 삼보일배는 국회와 정부를 향한 질책이기도 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책임지지 않는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속세에서의 명예와 이익만을 좇느라 유가족과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조차 없는 진심을 멸하고, 뻔뻔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치심을 멸해야 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라 국회와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설명] 왼쪽 /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삼보일배 기자회견, 오른쪽 / 삼보일배 행진중인 4대종교인, 유가족, 시민들 (사진출처 :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8월 31일, 10.29이태원참사진상규명특별법은 행안위를 통과하였습니다.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거리로 나서야 했고 어느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1주기를 앞두고 행안위 통과를 기뻐하며 안도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1주기를 앞두고 얻은 것이 행안위 통과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10.29이태원참사의 고위책임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탄핵은 기각되었고, 형사공판의 진행은 지지부진하고,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이 직에 복귀하였습니다.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여전히 만연하며, 생존자는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하고, 지원을 위해 피해자임을 입증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은 국내 유가족보다 더욱 소외되고 있고, 피해자 지원을 위한 정책들은 허울뿐입니다.
[사진설명] 왼쪽 / ‘이상민 장관은 무엇을 위반했고 무엇을 책임지지 않았나’ 토론회에서 조인영 변호사, 오른쪽 / 이임재 용산경찰서장 등 석방 규탄 및 엄중처벌 촉구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맡은 조인영 변호사 (사진출처 :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재난 참사 피해자들의 요구가 ‘권리’라면 왜 가족들은 이토록 소리높여 외쳐야 하고, 실망과 분노를 반복하며 마음에 생채기를 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 권리 보장은 요원하며, 이는 무수한 투쟁 끝에서만 겨우 얻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소리높이는 순간뿐 아니라 숨죽여 우는 그 모든 순간 싸우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그리고 남은 가족을 잃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싸울 수 있는 힘은 분노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마음을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고 희생자를 기억하는 가족들 간의 연대가 이 싸움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항상 심리상담보다 분향소를 와서 희생자의 영정을 정돈하고, 다른 가족들과 얘기하는 것에서 더 큰 위안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가족들의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이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함께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해봅니다.
1주기를 앞두고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공감을 지켜봐 주시는 분들도 1주기 행사와 프로그램에 함께 해주시기를, 그리하여 소란스러운 혐오보다 조용한 응원과 추모의 마음을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사진설명] 왼쪽 / 이태원 기억의길 추모공간을 가득채운 메세지들, 오른쪽/ 10.29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 추진위원 가입 안내 웹자보 (사진출처 :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