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자원활동가의 활동] 죽도록 일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과로의 섬]을 읽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일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왔다.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공부하면 ‘성실한 학생’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반면 잠을 푹 자고 무리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너는 고3이 맞아?”라는 의심을 받는다. “성공하기 위해서 죽도록 노력해 보았나요?”라고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말들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강요받는 우리는 오늘도 ‘과로’하지 못한 우리를 책망한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소개할 책 <과로의 섬>은 한국과 너무나 닮아있는 대만의 과로사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황이링(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활동가)과 까오요우즈링(국회기자이자 저널리스트)은 국회에서 활동하며 많은 과로사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들은 그 과정에서 경험한 과로 노동자의 삶과 과로사를 인정받기 위한 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과로의 섬>에 담았다.
이 책은 한 엔지니어의 죽음을 파헤치며 시작한다. 난야테크놀로지에서 근무하던 쉬샤오빈은 어느 날 새벽,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 앞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떠났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아왔던 쉬샤오빈이 왜 새벽까지 일에 파묻힌 채 목숨을 잃어야만 했을까? 그는 원치 않는 승진 이후, 노동시간을 측정하지 않는 재량근로제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재량근로제는 업무 특성상 근로시간으로 성과를 측정하기 곤란한 업무에 한해 사용자와 근로자 대표가 사전에 합의한 시간만큼만 일한 것으로 인정하는 근무 형태이다. 이 경우 따로 근무시간을 측정하지 않기 때문에 초과근무를 하더라도 인정받기 쉽지 않다. 쉬샤오빈 또한 하루 평균 업무시간이 언제나 10시간을 초과하고 퇴근 후에도 수차례 업무전화를 받았지만, 야근 수당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과로를 하게 되었고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도 쉬샤오빈 사건은 과로사로 인정받기까지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당시 대만은, 과로사를 인정받기 위한 기준이 매우 까다로웠다. 과로사의 원인이 된 질병과 과도한 노동시간 간의 직접적 인과가 증명되어야만 과로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보험국은 질병과 노동시간 간의 인과를 증명할 연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과로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로사 연구가 부족한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개인적인 질병 혹은 유전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며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럼에도 저자 황이링과 쉬샤오빈의 가족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과로사의 현실을 대만에 알리기 시작했다. 큰 충격을 받은 시민들과 대만 사회는 직업으로 촉발된 정황이 있다면 모두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업무시간 인정기준을 낮추는 등 과로사 인정기준을 대폭 완화하였다.
2010년 쉬샤오빈 사건을 계기로 과로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만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과로로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과로의 섬>에는 근로기준법 노동시간 상한의 적용을 받지 않아 야근이 일상임에도 초과근무수당을 받지 못한 보안요원 아웨이, 의료 인력 부족으로 인해 월 360시간 일하다 수술방에서 쓰러져 전신 근육이 마비된 레지던트 리우청야오 등 여전히 과로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한국도 코로나 당시 택배 노동자들의 과도한 업무와 과로사 문제가 알려지며, 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죽도록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노동자들의 삶보다는 기업과 국가의 성장을 중시한다. 노동자들을 ‘소모’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많이 언급되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 또한 노동자를 ‘소모’하는 문화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성장을 명목으로 반도체 고임금 노동자들에게는 52시간 노동상한제와 초과근로수당 지급 규제를 면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와 기업이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한들, 그 결실을 누릴 사람이, 노동자가 없다면 그 성장이 무슨 의미일까?
성공하기 위해,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야’하는 사회에서 죽을 만큼 노력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무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정부와 기업은 이들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는 양 “안타까운 마음에 도의적 사과”를 한다. 정말 이것이 개인이 무리한 결과일까? 무리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 불성실한 사람,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는 족쇄가 채워지는 현실에서 쏟아지는 일을 외면한 채 기업에게 단호하게 휴식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공신화”는 국가와 기업이 노동자를 ‘소모’하도록 하는 잘못된 관습과 제도들을 가린 채 끊임없이 개인을 탓해왔다. 인간은 소모품이 아니다. 기업과 국가의 성장을 위해 끝나버린 노동자의 삶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노동자 개개인의 삶을 지워버리고,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처럼 여기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글_강윤서 (공감 41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