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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에서의 한 살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약속에 늦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 선발 면접에 늦고 말았다.
기대로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지만 설마 늦잠을 잘 줄이야, 그것도 면접날에.
‘가회동의 ’아름다운집’을 다시 들를 일이 있을까,
역시 면접을 보시던 박원순, 박태범 변호사님 두 분은 참 멋진 분이셨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며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데, 염형국 변호사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형, 합격했어요.”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될 뻔한 일과 가장 기뻤던 일이 있던 날.
그로부터 1년…

이미 오랫동안 공익활동을 하신 변호사분들과 단체들을 방문해 자문을 구한 내용들을 가지고 사업계획서를 짜던 시간, 이름(‘공감’이란 이름은 정정훈 변호사의 아이디어였다)을 짓기 위해 여러 안을 두고 고민하던 일, 처음 파견공고가 나간 ‘시민의신문’ 광고를 보며 감격해 하던 일, 2.14. 부안 방사성핵폐기물처리장유치 찬반 주민투표 때의 감동, 첫 MT 때의 즐거웠던 시간, 처음 법정에 설 때의 긴장감과 떨림,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한 소송결과에 낙담했던 일,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시면서 몇 번이나 사무실을 찾아와 상담을 했는데 결국 연락이 끊겨버린 할머니, 모두가 투덜대면서도 몇 시간씩 계속되었던 회의(처음엔 논의할 게 참 많았다. 모든 것이 논의대상이었고 작은 것도 모두가 함께 했었다), 기꺼이 공감의 일을 나누어 주신 변호사분들과 인턴들, 초창기 언론인터뷰가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던 일, 그리고 파견단체에서의 일…

돌아보면 적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분들의 격려, 소중한 도움과 얼굴조차 모르는 많은 분들의 작은 손길들이 떠받쳐 공감이 1년을 지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법조라는 울타리 속 여태까지 낯설고 작아 보였던 ‘공익’을 위한 자리에 이미 많은 선배들이 거쳐 갔고, 또 많은 분들이 함께 함을, 일을 하면서 처음 잘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공익변호사로서 도움을 드린 일보다 참된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좋은 분들을 많이 뵈면서 생의 위안을 받는 일이 더 많다.

그때 면접을 보던 장소는 지금 공감의 사무실이 되었고, 사무실 창밖의 소나무도, 대나무도 그사이 몇 뼘씩은 자랐다. 어느새 공감도 1차 공익단체 파견지원을 마치고 2차 공익단체파견을 하고 있으며, 12월부터 새로이 한 분 변호사님도 합류했다.

올 한해 공감과 함께 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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