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소송 당사자 이야기] 살고싶다, 사람이니까
또 다. 살던 흑석동이 재개발 되면서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 흑석동, 사당동, 남영동, 멀리는 영등포까지 여기저기 방을 알아보는 꿈이다. 귀신이 나오는 것도,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내게는 최악의 꿈이다. 일어나면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꿈이지만 얼마나 절박하게 돌아 다녔는지 다리가 다 아프다. 살던 동네가 뉴타운으로 재개발 되면서 하루 아침에 쫓겨나게 생겼던 2008년.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내게 그 때의 공포는 현재진행형인 게다. 나는 흑석동 뉴타운 재개발 6지구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살던 세입자이고, 주거이전비를 달라고 행정소송을 낸 정현정(48세, 가명)이다.
2004년 10월. 소박한 행복한
남편의 사업이 망하면서 흑석동으로 들어왔다. 손에 쥔 것은 단돈 500만원. 차를 판 돈이다. 남들은 사업이 망해도 몇 푼이나마 건진다던데, 남편은 “빚을 졌으니 다 줘야지”라며 사람 좋은 소리를 했다. 500만원에 월세 25만원 집을 구했다. 방 둘에 화장실이 있는 작은 연립주택이다. 그래도 동네는 마음에 들었다. 도시가스도 들어오고, 물도 잘 나오고, 길은 좀 오르막이지만 포장길이니 걸어 다닐 만 했다. 길가로 옹기종기 연립주택들이 모여 있고, 손때가 가득 묻어 있는 동네. 사람 사는 데가 다 이렇지 않나. 아이들은 근처 학교에 다니고, 집에는 햇볕도 잘 들어오고. 살 만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2008년 여름. 백 만원, 백 만원의 시작
“언제 나갈 거요?” 날마다 재촉이다. 나갈 날짜를 적고 사인을 하란다. 6월 내내 방을 알아 보러 다녔지만 아직 방을 구하지 못했다. 보증금 500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뉴타운 재개발이 여기저기서 동시에 이뤄지면서 집값은 배 이상 올랐다. 가장 싼 곳이 천 만원에 월세 60~70을 불렀다. 그나마 지하다. 하루 아침에 나가라니, 너무 막막해 조합을 찾았다. “사정이 딱하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다. “이사비 백 만원 정도라도 달라”고 부탁해봤다. 세를 살다 나가도 이사비는 주지 않나. 반응은 마찬가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그래요? 정말 백 만원도 안 줘요? 한국 법이 정말 그래요?” 이사 할 돈도 없는 집.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들과 거리로 내앉을 순 없지 않나. 그게 시작이었다.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 1심과 2심 사이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 54조 제 2항에 의하면 공익사업시행지구 안에서 3개월 이상 거주한 세입자는 주거이전비와 이사비를 받을 수 있다. 이걸 아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혼자서라도 법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소장을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 인터넷 검색을 했고, 행정소송을 해야 한다는 것도 법원에 접수를 하러 가서야 알았다. 법원 접수창구 앞에서 부랴부랴 서류를 고쳤다.
법원에서 느낀 막막함은 동네서 느끼는 공포에 비할 바가 못됐다. 동네에서는 우리 집만 남았다. 흑석동 6지구 마지막 세입자. 가장 형편이 딱한 집이라는 뜻이다. 요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 전기와 수도를 끊었다. 보일러가 돌지 않아 차가운 집에 마음은 더욱 얼어붙었다. 꽁꽁 얼어 붙은 한겨울 깜깜한 빙판 언덕길을 오르는 것은 고역이었다. 일하다 밤 12시, 1시나 되야 퇴근하는 나를 위해 두 아들은 매일 밤 길을 닦아 놓았다. 빙판 길에 염화칼슘을 뿌리고 망치로 얼음을 깼다. 내가 발을 옮길 수 있는 정도였다. 발자국은 사람 뒤를 따르는 것인데, 나의 귀갓길에는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내 발자국이 나를 먼저 맞아 주었다.
2009년 11월. 돈 벌려고 그러는 거라고 누구는 손가락질 하지만
조합에서 돈을 들고 찾아왔다. “돈을 다 줄 테니 소송을 취하하라”고 했다. 1심을 이겨도 꼼짝 않더니 2심마저 이기고 3심에서도 가망성이 없어 보이니 태도가 달라졌다. 힘들다고 푸념 한 번 않던 아들이 “받자”고 했다. 그간 내색은 안 했지만 아이도 힘들었던 것이다. 받고 싶었다. 동시에 공감을 처음 찾던 날이 생각났다. 처음 서울행정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니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도움이 절박했다. 그 때 공감을 만났다. 공감은 오랫동안 홀로 싸우던 나를 유일하게 도와준 곳이었다. 나 혼자 편하자고 돈을 받을 순 없었다. 나를 도운 공감의 선의를 저버리는 것 같았다. 이유는 또 있다. 왕십리 뉴타운에서, 서울 곳곳의 재개발 세입자들이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주거이전비를 받기 위해서다. 내 재판에 힘을 얻은 이들이었다. 소송 시작 전, “아줌마 혼자 돈 주고 끝나는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이건 우리 일만은 아니란 말입니다”던 조합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옳은 일이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양심대로 살자고 결정했다. 돈만을 바랐다면 2심이 끝나고 그 돈을 받고 말았을 것이다. 시작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나와 같은 사람들 모두의 생활이 걸린 일이 되었음을 절감했다.
2010년 7월 10일 현재. 사당동 지하 월셋방
1심과 2심 모두 이겼지만 아직 돈은 받지 못했다. 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500만원을 빌려 작년 겨울에 사당동 방 두 개 지하로 겨우 이사를 했다. 2심 승소 뒤 조합에서 천오백만 원을 받았다면 햇빛 드는 집에 살 수 있었을 터였다. ‘고법에서 이겼으니 우선 돈을 좀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법에서 지면 돈을 돌려주더라도 말이다. 당장 하루 살아내기가 팍팍한 서민의 심정은 그렇다.
재판 시작할 즈음에 군대에 간 큰 아들이 곧 제대를 한다.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지금 소망은 대법원 판결이 올해 안에 나는 것이다. 그러면 돈을 받을 것이고, 그걸로 아들 대학 등록금을 냈으면 한다. 대학이라도 나와야 그래도 아들이 후에 밥술이나 뜰 것 같은데, 한 달에 백오십만 원 남짓 버는 지금 내 처지에서는 등록금 대기가 쉽지 않다.
재판을 시작한지 2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돈을 받자던 아들 보기 겸연쩍은 맘도 든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소송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를 도와주는 공감이라는 곳을 만나 그래도 편하게 왔다고 생각한다. 난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나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런 대로, 저런 사람은 저런 대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는 쉽지 않다. “너희는 자격미달이라고, 나가서 살라”고 자꾸 나 같은 사람들을 밀어내는 듯 하다. 재판을 시작할 때 마음은 딱 하나였다. 어떻게 하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 평범하게 최소한의 의식주가 충족되는 생활. 사람이니까 이 정도 욕심은 내 봐도 되지 않나. 이것도 욕심인가? 그래도 난 욕심을 내 보려 한다. 아롱이다롱이 삶의 방식은 달라도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야 좋은 세상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약자니까,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쓸려 내려가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도 이 곳에서 살게 해 주십사…… 그것뿐이다.
(본 글은 정현정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글_11기 인턴 김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