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권하는 책]헌법-‘자유’와 ‘민주’의 공동경비구역
이국운 교수의 <헌법>은 책세상 출판사의 ‘개념사’ 시리즈의 하나로 기획된 책이다. 170쪽이라는 책의 분량에 비해, 그 내용은 결코 간단치 않다. 간단치 않은 내용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제시하려는 저자의 배려와 편집의 노력이 읽힌다. 이국운 교수의 여러 논문들에서 사고의 계발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맛보았던 나로서는, 이 단행본의 출판이 무척 반갑다.
많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딱딱한 법의 개념들에 울렁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헌법 교과서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이 책을 손에 드는 것이 헌법의 본질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해 본다.
또 법의 개념에 친숙한 독자들에게도, 근대적 헌정주의의 성립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표상정치의 한계 극복 기획으로서의 헌법’이라는 책의 문제의식도 새롭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등 기독교의 자기 혁신 과정이 헌정주의의 근대적 혁신 과정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이라는 관점도 새롭고 유익하다. 저자의 기독교적 관심과 연구가 헌법 논의의 풍경을 한 차원 풍요롭게 한 것으로 읽힌다. 이 책에서 인용된 책들 중 아직 번역되지 않은 여러 책들이 하루 속히 번역 출판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가져본다.
헌정주의, 정치학적 접근과 헌법적 접근
최근의 정치학적 접근은, ‘헌법의 길’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왔다. 가령 최장집 교수는 헌법을 민주주의 발전의 첩경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정치 외부의 과정에 의해서 정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또 이런 관점에서 법치에 의한 ‘민주주의의 축소’ 우려와, ‘헌법 개정의 정치’가 아닌 ‘일상적 정치’와 ‘입법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견해(박찬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학계의 견해는 헌정주의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 관습헌법에 의한 수도 인정,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결정 등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에 비추어 논의의 현실화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헌법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진단이 가능하겠지만(저자는 이를 “헌법 개념론의 지식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헌법이라는 규범의 해석학에 갇힌 채 헌법과 정치라는 헌정주의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헌법학의 왜소한 현실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표상정치의 한계 극복의 기획”이라는 관점에서 헌정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이 책이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트로이>와 표상정치, 새로운 대안
책의 내용을 거칠게 일별하면 이렇다. 저자는 ‘표상정치’를 영화 〈트로이〉를 통해 설명한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두 대표간 대결의 승패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표상정치는 근본적인 한계에 취약하기 때문에 헥토르의 ‘개입’이나, 오디세우스의 ‘간계’로 쉽게 붕괴된다. 표상정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표상정치에 투항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기획으로서 ‘헌법’의 고안이 ‘헌정주의’의 문제의식이다. 근대적 헌정주의는 고차법 사상과 혼합정체의 이념을 헌법에 제도화함으로써 표상정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근대적 헌정주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를 거쳐 ‘헌법민주주의’ 시대에 이르렀다. 헌법민주주의는 ‘차이의 정치’를 긍정하는 탈근대적 민주주의와 전술적 동거를 수행하지만, ‘법률가 수호자주의’의 위험을 드러내고 있다.
‘법률가 수호자주의’의 위험, 즉 법치에 의한 민주의 축소 위험이라는 진단은 정치학의 헌법 현실에 문제의식과 같다. 그러나 제시되는 대안은 다르다. 정치학적 접근이 ‘정당민주주의의 활성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저자 이국운 교수는 ‘타자성의 관점에서 헌정주의를 새롭게 이해’하고 ‘주권 개념을 재구성“할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심의적 민주주의’라는 온건한 흐름과 ‘직접행동 민주주의’라는 급진적 흐름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표상논리의 온건화(심의민주주의), 개입논리의 체계화(직접행동주의)라는 저자의 대안과 정당민주주의의 활성화라는 정치학의 대안은 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정당민주주의의 내용을 심의민주주의와 직접행동주의의 관계 설정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이 이른바 새로운 ‘진보정치’의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이 책 <헌법>을 통해서 내가 얻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 작은 책이 오늘의 헌법 현실과 헌정주의에 대한 더욱 풍요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공동경비구역(JSA)
개인의 자유를 앞세우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자치를 강조하는 ‘민주주의’라는 모순적인 정치원리의 결합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원리이며, 그 타협을 제도화한 것이 헌법이라는 저자의 관점도 숙고할만하다.
자유와 민주의 정치원리가 궁극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모순과 긴장, 갈등의 관계이고, 이러한 관계를 기록한 것이 헌법이라면 헌법은 언제나 새로운 독해와 실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헌법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공동경비구역(JSA)이고, 또 ‘항상 도래해야할 하나의 민주주의’(무페)일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헌법은 ‘갱신의 역사를 담은 중층적 텍스트’이고, 자유나 민주의 일방적 팽창을 저지하는 ‘절대주의의 안티테제’다.
(* ‘공동경비구역’(JSA)라는 표현은 정태욱 교수의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설명(《정치와 법치》, 책세상, 2002, 54쪽)으로부터 착안한 것임)
글_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