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권하는 책] 관용에서 평등으로
미국의 인종문제에 대한 비유는 ‘용광로’에서 ‘샐러드 그릇’으로 변화되어 왔다. 미국 사회가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진실』의 저자 데릭 존슨은 이 ‘샐러드 그릇’이라는 비유의 문제를 지적한다. ‘용광로’의 은유는 적어도 ‘누가 녹고, 소멸하는가?’라는 문제와 그 과정의 폭력성을 드러내지만, ‘샐러드 그릇’의 비유는 ‘거짓 관용’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므로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 관용’과 대비되는 ‘참된 관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관용 : 다문화 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대답은 짧다. 그 놈이 바로 그 놈이었다는 것이다. ‘거짓 관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용’ 그 자체가 폭력과 불평등의 문제를 은폐하고 정당화한다.
관용 f(x) =(1/평등) x + 자유주의 → 탈정치화
웬디 브라운은 ‘관용’을 통치성의 함수라고 설명한다. 관용은 평등을 확장하는 기획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평등이 제거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차이들을 ‘관리’하며, 평등의 문제를 축소·은폐한다. 그 결과 ‘차이의 문제’는 탈정치화된다.
옆의 그림은, 이 책을 함께 읽었던 대학생 인턴이 제시해 준 것이다. 그림은 ‘관용’이 강자의 언어임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림은 말한다. “비록 너는 명백하게 틀렸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축복하자.” 웬디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관용할 때 혹은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관용할 때, 전자의 집단은 관용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용을 베푸는 그들의 위치는 관용을 필요로 하는 후자의 집단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해 준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림 바깥에 있다. 그 바깥에 국가가 있다. ‘차이’가 사적 영역에서 관용될 때, 그 차이(difference)에 대한 가치 평가(wrong)를 본질적인 것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국가다. “관용은 국가의 법에 의해 보장된 관용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개인이 개인에게 행하는 종류의 관용일 뿐이다.” 그래서 “관용의 언어는 국가 폭력을 승인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사회에 요구되는 ‘관용’은 국가(또는 규범 자체)에 대한 질문을 생략하게 한다. 이것이 관용의 통치성이고, 탈정지화 효과다.
‘다문화사회’로의 제도적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한 채, ‘다문화’ 담론들만이 무성한 이상한 현상의 배후에는 ‘관용’의 통치성이 있다.
웬디 브라운이라는 매혹
이 책으로 나는 웬디 브라운에 매료되었다. 그가 왜 이렇게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그의 다른 책들도 번역 출판되기를 기다려 본다. 또 이승철씨의 번역도 훌륭하다. 충실한 역자주가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의 메시지를 나는 “관용에서 평등으로”라고 정리한다. 평등의 영역은 정치적 구성의 장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웬디 브라운이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인종, 동성애와 같은 차이의 문제들이 ‘관용’ 담론을 통해서 논의된 반면, 어째서 남녀간의 불평등은 ‘관용’이 아니라 ‘평등’의 구호 아래 논의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면, 바로 이 책으로 웬디 브라운이라는 매혹을 함께하시길 권한다.
글_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