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권하는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정정훈 변호사
<쩐의 전쟁>, ‘쩐의 욕망’
‘사채 이자보다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드라마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박신양)와 은행원 여자(박진희)의 사랑 이야기를 한 축으로 다룬다. 그러나 ‘돈의 복수’를 위해 삶의 주인공 자리를 화폐에 넘긴 조역의 삶에게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길 뿐이다. 화폐에 주인공의 자리를 뺏긴 삶이, 상처받지 않고 그 삶의 조건을 사랑으로 넘는 일이 가능한가? ‘착한 사채업자’라는 형용모순처럼, 그 사랑은 환상이 아닐까. 드라마 <쩐의 전쟁>이 위험한 이유는, ‘내 삶의 주인공’이 진정 누구인지를 따져 묻지 않고 내리는 해피엔딩은 안일하기 때문이다.
‘무이자, 무이자~~’를 노래하는 대부업 광고의 유치한 속임수야 누구나 알고 있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법. 그럼에도 그 ‘무이자’의 유혹에 불나방처럼(혹은 ‘오징어잡이배의 집어등을 향하는 오징어처럼’) 몸을 맡겨, 소비를 선택하는 욕망과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철학자 지젝은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행동한다.”의 구조. 그 거짓과 위험을 잘 알지만, 그래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구조라면, 그 이데올로기의 중심에는 ‘쩐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 강신주의 이 책은 그 ‘쩐의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오늘의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인문학적 보고서다. ‘돈의 이빨’에 목을 내맡기도록 우리들의 욕망을 관리하는 자본주의적 구조, 그것이 바로 백화점으로 상징되는 도시이고, 패션과 유행이며 그 에로티시즘이다.
그래서 ‘무이자, 무이자~~’를 외치는 돈의 주술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소비는 지금, 지불은 나중에’라는 신용카드의 구호는 ‘무이자~~’의 노골적인 본질과 그리 다르지 않다. 철학자 강신주는 더 나아가 묻는다. 한달치 월급으로 교환되는 노동을 딱 그만큼의 소비로 교환하는 우리들의 삶은 어떠하냐고? 노동과 소비라는 자본주의적 삶의 메트릭스에 갇혀, 화폐경제가 만들어낸 개인주의에 코를 박은 채, 화폐에 대한 신앙으로 미래를 소비에 저당 잡힌 우리들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자고.
화폐와 욕망, M-C-M’이라는 자본주의적 마법
개인이 노동자로서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M-C)과 소비자로서 상품을 사는 과정(C-M’)이 결합되지 않고서는 자본의 순환과정(M-C-M’)은 성립될 수 없다. 맑스는 뒤의 과정, 상품이 팔려 교환가치를 실현하는 과정(C-M’)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설명했다. 이 도약이 실패할 경우에 맞는 죽음의 결과가 바로 ‘공황’이다. 맑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계획성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으로 인해, 그 실패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 강신주와 그가 초대한 철학자들의 진단은 다소 다르다. 그들은 맑스가 여전히 ‘생산(력)주의의 한계’에 빠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맑스 역시 유통과정(C-M’)의 중요성을 간파했지만, 여전히 그 실패를 생산의 무정부성과 공황이라는 생산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생산’보다는 ‘소비’의 과정이 더 본질적이며, 소비의 관점에 서야 자본주의의 질긴 생명력을 보장하는 마법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한달치 월급으로 누리는 ‘소비의 자유’ 그 이면에는 ‘돈에 대한 복종’이 자리하고 있다. ‘소비의 자유’가 ‘노동의 의무’로 바뀌는 지점, 바로 그 ‘돈에 대한 복종’에 자본주의적 마법이 있으며, 그 마법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끊임없이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을 만들어 내고, 새로움에 대한 강박을 재생산하며 욕망을 생산․관리하는 체계가 자본주의다.
88만원 세대의 선녀와 나무꾼
맑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평가했다. 노동력을 팔아 ‘소비의 자유’를 사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들 삶의 조건이고, 개인에게는 ‘목숨을 건 도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무꾼의 속임수를 알아버린 선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삶을 선택하듯이, 이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는 꿈을 꿀 수 있는가. 신용카드가 목숨을 끊는 칼이 되고, 온통 ‘쩐의 전쟁’이 되어버린 이 냉혹한 싸움판에서, 과연 우리들은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팔리기 위해 ‘스펙’ 관리에 일로 매진중이건,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미지근해 적잖이 쓰려오는 속을 부여잡고 있건 간에,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한번쯤은 인문학으로부터 시작하자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저자의 이 책이나 인문학이 쌈박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과함께, 질문을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대답은 질문하는 각자의 몫이며, 질문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시작이다. 자 묻자. 내 삶의 주인공은 진정 누구인지를. 화폐가 주연하는 인생의 무대에서 다만 조연의 삶을 연기할 것인지.
<이 글은 성균관대의 오거서운동 웹페이지에 2009년 10월 30일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