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권하는 책] 천만 비정규직 시대의 희망선언 –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
장마철, 물에 잠긴 은마아파트 지하에서 일하던 청소 아주머니가 감전을 당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후 나는 감전사를 당한 청소 아주머니와 유가족을 위해 법률자문을 하였다. 유가족으로부터 아주머니가 쓴 근로계약서와 각서, 급여 내역이 찍힌 통장 사본 등을 받아 보았다. 매일 아침 일곱 시부터 네 시까지 일하면서 아주머니가 받은 월급은 85만 원이 채 안 되었다. 근무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사망해도 본인의 귀책사유를 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읽을 때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 – 천만 비정규직 시대의 희망선언’, 이 책을 읽다가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청소노동자인 엄마, 계약직 노동자인 딸이 나누는 대화에서 아픈 과거가 떠올랐다.
“일 그만 하시고 이제 좀 쉬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둘째 곧 제대하면 복학할 테고,
막내 전문대라도 보내려면 앞으로 4~5년은 같이 벌어야 하니까
일하시려면 아프지 말라는 이야기,
15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에 계약직인 내 처지에 엄마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제123쪽)
이 책에 실린 세 개의 만화 중 심흥아가 그린 ‘새벽’의 한 장면이다. 비단 만화를 그린 작가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소시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혼자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부모, 자식 가릴 것 없이 노동 현장에 뛰어 들지만 여럿이 벌어도 절대 풍족한 삶은 꿈꿀 수 없는 현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불안정노동이 우리 시대 ‘노동’의 보편적인 표상이 되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작가 홍명교는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했던 자신의 경험, 특히 홍익대학교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들의 49일간의 농성을 화두로 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간다.
2010년 12월 홍익대학교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설립하자 그 다음 날 홍익대학교는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가 소속된 용역업체와의 용역위탁계약을 해지했다. 이들 노동자의 근로계약은 용역위탁계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용역위탁계약의 해지는 사실상 노동자 전부에 대한 해고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홍익대학교는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의 고용 문제는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노동자의 사용자가 그전에는 홍익대학교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법률 지원을 위해 내가 만나 본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도 그러했다. 십 년 전에 일을 시작해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홍익대학교에서 일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사용자가 바뀌었단다. 홍익대학교가 시설 관리 업무를 외주화한 그 순간 말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 열풍이 일어나면서 생긴 일이었다. 홍익대학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학, 공공기관, 정부부처, 일반 사기업체까지 외주화 작업에 열을 올렸다. 이익은 챙기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간접고용이 어느 순간 우리 시대 보편적인 노동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홍익대학교에서 벌어진 일이 사회 전체로 퍼진 데에는 홍익대학교 총학생회의 역할(?)이 컸다. 총학생회는 ‘학습권’을 주장하면서 노동자들 문제에 ‘외부세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보지 못하고 연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어설픈 발언이 작가 홍명교를 홍익대학교로 끌어들였다.
“농성장 역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외부세력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다른 여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문헌관 1층 로비는 대자보, 시민들이 가져온 온갖 먹을거리, 과일, 라면박스 등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제84쪽)
사실 서울 지역의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의 전체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은 세 학교의 학생 4만여 명이 지지서명에 동참하는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역으로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이 학생자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징계 조치를 받았을 때, 청소노동자들은 싸움이 지속된 1, 2년 내내 연대하기도 했단다. 쓰레기라는 단어를 보고 ‘버리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학생들과 ‘줍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청소노동자 간에 간극은 있었지만 이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불안정한 삶에서 모두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특수고용 노동자는 청소노동자의 현재지만 학생들의 미래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를 그냥 훌륭한 사람, 또는 타인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
정도로 기억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이타적 인간’의 유형은 전태일 열사 외에도 무수히 많지 않은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화석화’된 위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오늘날까지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존재로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제147쪽)
그러나 40년 전 노동 탄압의 양상과 현재의 노동 탄압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노동시간을 늘리고 임금을 적게 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특수고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노동 환경이 불안정하기 때문만은 아니며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노동자들이 연대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조합들은 민주노총을 탈퇴하기에 이르렀으며,
또 어떤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이 점하고 있는 파이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나누지 않으려 대놓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무참한 배반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203쪽)
이에 대해 작가 홍명교가 내놓는 해답은 명확하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처한 불안정한 노동의 조건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처한 동일한 현실의 상황도 바라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을 적시할 것! 그리고 연대할 것!
“대학생을 포함한 모든 20대 청년들도 인턴이나 아르바이트와 같은
불안정노동과 청년실업의 현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과 청년들의 싸움의 현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들을 유발한 ‘원인’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와 자본이 자신들이 벌여놓았던 ‘금융투기 세계’의 위기와
그 피해를 가장 먼저 노동자나 빈민, 농민, 청년들에게 전가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위기를 우회적으로나마 만회하려는 것을 생각하자.
그 해결책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정규직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특수한 권리를 위한 것이라고 폄훼할 순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모든 시민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요청이라는 것이다.” (제280쪽)
작가 홍명교의 이야기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거나 익히 들어온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 홍명교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혹은 연대의 경험과 따뜻한 마음이 이 책에 녹아 있기 때문이며, 작가 홍명교의 이야기가 내 머리를 깨우치는 것은 그가 근시안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노동 이야기를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작가는 쉽게, 그러면서도 빠뜨림 없이 노동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이 책만 읽어도 현재 노동 지형이 어떠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안정한 노동 현실에서 허우적거리는 20대 청춘과 50대 이상 중고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누군가는 나처럼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30, 40대가 예외인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불안정한 노동자이며, 연대해야 할 동지이기 때문이다.
글_윤지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