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칼럼]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사회의 인권 – 나현필
[공감칼럼]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사회의 인권
나현필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필지가 사는 곳은 서울의 한강변이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갑자기 동네와 올림픽 대로사이에 커다란 광고판이 생겼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성화가 움직이는 곳에 위치한 허름한 우리 동네 집들을 가리기 위해 광고판이 설치된 것을. 우리 동네만이 아니었다. 국가적 행사 올림픽을 위해 수많은 빈민들이 철거민이 되었고, 그 사실은 철저하게 감춰졌다. 어김없이 금메달만 따면 대통령까지 등장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찬양하던 풍경은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나치도 그러지 않았던가? 위대한 아리안족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준비된 베를린 올림픽은 정치가 어떻게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행사를 이용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이다. 서울올림픽도 광주를 피로 물들인 두 독재자에게 국내외의 인권탄압에 대한 비판을 잠재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또다시 올림픽이 다가온다. 이번엔 20년 만에 아시아, 더욱이 중국에서 열린다. 또 언론은 한국선수단의 선전을 기획하는 쇼들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반드시 일어나게 될 중국선수단의 편파판정은 반중국 정서를 만들 것이며 베이징 하늘에 올라갈 태극기는 또 우리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20년만에 열리는 아시아에서의 올림픽은 개최 3개월을 앞둔 지금 이미 심각한 위기에 빠져버렸다.
티베트, 버마, 중국
4월 27일,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티베트 인권요구 시위대에 시달린 성화가 서울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성화를 수호하기 위해 모인 중국유학생들이 티베트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하였다. 즉각 언론은 중국유학생들의 자질서부터 시작하여 민족주의적 반감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거기엔 얻어맞은 “한국인”과 때린 “중국인”만 있었지, “중국정부”에 의해 탄압받는 “티베트”와 티베트의 인권현실에 눈감은 “한국정부”는 빠져있었다. 실체도 불분명한 국익이란 논리 때문에 작년 버마에서 발생한 민주화 요구시위와 올해 티베트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 눈감는 한국정부의 저질외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한국사회가 티베트의 인권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고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성화도착을 앞두고 뜬금없이 북한 인권단체에서는 성화를 저지하겠다고 나섰었다. 가뜩이나 버마 및 티베트 이슈가 미국이 지원하는 인권 문제라고 해서 국내 진보진영에서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에서 보수단체들의 뜬금없는 올림픽 성화 봉송 저지 움직임은 향후, 두 나라의 문제를 북한 인권문제와 같이, 보수단체의 영역으로 고착화 시킬 위험 을 내보인 것이다.
사실, 탈북자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인권현안에 대해서 중국정부가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내 여러 인권현안에 눈감을 뿐만 아니라 실제 활동에 있어서도 티베트와 버마문제를 이용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보수단체들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우려스럽다. 중국유학생 폭력사태를 계기로 보수단체들이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 대립이나 중국공산당(내심 북한정부를)을 타겟으로 하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이끌고 간다면 묵묵히 티베트와 버마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 촛불을 들어온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너무 허망해 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진영 역시 티베트와 버마의 목소리가 미국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해서도 안 된다. 한국사회가 두 나라의 문제를 “한국” 혹은 “한반도”란 개념 속에서만 바라보려 한다면 정작 그 곳에서 피 흘리고 있는 이들의 아픔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이에 저항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경청할 가치가 있다. 거기에는 어떤 국가 혹은 어떤 민족에 의한 억압인가는 다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문제를 국가 혹은 민족의 문제로 강조하는데 익숙해져있다. 결국 민중들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베이징 올림픽이 중국의 여러 인권문제를 덮으려는 중국정부와 다국적기업들의 거대한 광고의 장으로 이용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한다는 한국기업의 마케팅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아픔을 보지 못할 한국시민들이나, 위대한 중화의 영광인 올림픽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 중국유학생이나 사실은 같은 함정에 빠져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의 축제 올림픽을 위해
한 한국출신 대학생이 미국에서 총기난사를 벌이자 일부 한국인들은 미안하다며 촛불을 들었다. 9.11이 일어났을 때는 아예 전국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묵념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널이 버마 군사정권에 무기설비를 수출했을 때는 어땠는가? 정말 한국인의 이름으로 미안해야할 일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그 기업이 수천명을 학살한 버마 군사정권에 무기를 팔아넘겼음에도 말이다. 물론 미국의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해야함은 당연하지만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이라크와 레바논에서의 비극에 우리는 정녕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대우인터내셔널과 같은 기업이 있는가 하면 티베트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곳의 친구들을 위해 매일같이 광화문 한편에서 촛불을 드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국익이나 한미동맹에 대한 고려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먼저다. 진정한 올림픽의 정신은 금메달과 성공적 개최란 말로 포장된 막대한 이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작은 인류애의 실천 속에 있다. 티베트를 위한 촛불을 열심히 밝히는 분들 중에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이 있다.그래서인지 지난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팀을 다룬 영화는 금메달의 영광보다 비인기 종목 여성 선수들의 아픔이 더 부각되어 있다. 메달의 색깔과 개수로 종합순위를 매긴 것에 상위권이 된다고 해서 한국사회의 인권이 개선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버마에서는 사이클론이 들이닥쳤고 중국에서는 큰 지진이 일어났다. 올림픽을 앞두고 슬픈일들이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이것을 버마군부와 중국정부의 인권탄압 때문에 발생한 자연의 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재난이 발생하든, 전쟁이 일어나든 결국 고통 받는 것은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연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티베트의 아픔도 함께 나눠지길 기대한다. 중국정부가 국제사회의 구호노력에 감사한다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티베트에 대한 진상조사에도 합의해주길 기대한다. 역사서를 보면 경사를 앞두고는 죄인을 풀어주고 음식을 나누었다고 한다. 광우병 위험 소고기를 수입하고 이주노조 지도부를 강제 출국시키는 한국 정부 덕에 어느 때보다 차분한 올림픽이 예상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앞두고 이제부터는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