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칼럼] 선거구 인구편차 위헌결정과 평등한 대표 – 한상희 (건국대 법전원 교수)
지난 달 30일, 헌법재판소는 인구편차가 3:1에 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한 공직선거법에 대해 평등선거의 원칙 위반이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 편차가 아무리 많아도 2:1을 넘지 않도록 선거구를 조정하여야 표의 “등가성”이 보장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런 평등의 요청에 우리나라와 같이 도시화의 정도가 심한 국가에서는 농촌이나 어촌과 같이 정치과정에서 소외되기 십상인 지역의 이해관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선거구획정이 불가피하다는 반론도 제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지역의 문제는 지방자치의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간단한 당위 하나만으로 이를 제쳐버렸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의 숫자는 대의제의 가장 중요한 작동요소가 되는 양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인두세를 거두어들이는 세리(稅吏)의 미소처럼 마냥 가볍기만 하다.
하지만, 평등을 말하면서 굳이 2:1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헌법재판소의 이 결정 또한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선거구인구획정의 기술적 한계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을 다룸에 있어서는 4:1이나 3:1처럼 2:1 또한 마찬가지의 불합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가 정치학이 아니라 수학자들의 향연장이 되어 수많은 변형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선거의 결과를 가능한 한 유권자들의 의사와 일치시켜야 한다는 ‘표의 질적 등가성’이라는 요청 때문이다. 이에 정치적 소수자들이 던지는 표의 가치와 정치적 지배집단이 행사하는 표의 가치가 최대한으로 근접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수학자들-그리고 입법자-에게 주어진 지상의 과제가 된다. 하물며 단순히 상대다수를 획득한 1인에게 승자독식의 전리품을 안겨주는 현행의 체제에서 선거구의 인구획정이 2:1이건 3:1이건 혹은 1.1:1이건 표의 “등가성”은 도저히 이루어 못할 희망일 뿐, 그 어떤 헌법적 가치의 실현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환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저 어떤 정당의 어떤 계보를 타고 어떤 조직을 활용하는가라는 점만이 유권자들이 던지는 표의 가치를 결정하는 현행의 체제 그 자체가 표의 등가성이라는 요청을 본질적으로 저버리는 병리의 중심일 따름이다.
실제 이 결정은 1995년 4:1의 편차를 위헌이라 결정했던 때부터 예고되어 왔었다. 어쩌면 헌법재판소로서는 그리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외길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 몇 년이 지난 연후에 2:1을 위헌선언하면서 1.5:1이나 독일처럼 1.35:1(편차 ±0.15)이 올바른 등가성기준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르며 그 또한 헌법적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수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물론 이 모든 문제의 유발자는 20년에 걸친 유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해타산에 매달려 제대로 된 대표의 방식을 강구하지 아니하였던 정치권이다. 하지만, 선거관리라는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부재자투표시간을 오후 4시로 마감한 것은 합헌이라 선언함으로써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무력화시켰던 헌법재판소가, 총선등에서 투표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요구나 캐나다 퀘벡주에서와 같이 사용자에게 4시간의 투표시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표의 등가성이라는 부분적인 규범만을 내세우는 것은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느끼게 한다. 산술적인 평등을 과시하는 와중에 계급간의 평등은 은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헌법재판소가 경쾌하게 내 던져버린 지역대표성의 요청은 또 어떠한가? 인구대표성이 외국의 입법추세라고 한다면, 지역대표성을 실천하기 위한 제반의 제도와 실천들은 그 외국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 양원제 혹은 연방제 등의 방식을 통해 이미 현실화되고 정착된, 현재진행완료형인 것들이다. 지역의 문제를 지역이 아니라 중앙에서 전담하는 우리의 현체제로는 도저히 가 닿지 못하는 실천상의 간극이 그 외국과 우리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호남 예산 폭탄”이 국회의원선거에서 공공연하게 공약되고 유권자들은 이런 사탕과자에 미혹되어 표를 던지는 것이 현재의 어설픈 지방자치의 상황이라면, 혹은 누리사업이라는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정부의 무상급식예산을 압박하여 우리 아이들의 밥상까지도 빼앗아버리는 비정상의 지방자치라면, 더 이상 지역대표는 지방자치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체제는 인구희소지역과 인구밀접지역의 인구편차가 그 지역성 속에서 각각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같이 중앙정치의 소용돌이속에 편입되어 처절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어 있다. 이런 체제에서 인구편차 2:1이 고수되어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은 어쩌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수결의 세력다툼 속에서 포기되거나 혹은 저 “호남 예산 폭탄”의 경우처럼 제왕적 대통령의 백업에라도 기대야 한다는 또 다른 질곡상황을 만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우리 헌법의 평등요청을 철저히 형식화한다. 대의제의 본질은 웨스트민스트에 앉아 있는 대표들이 저 멀리 떨어진 식민지 인도까지 대표한다는 가상대표(virtual representation)의 틀이다. 그것은 대표되지 않거나 대표될 수 없는 것까지 대표하고자 한다. 전방위적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이 여기서 작동한다. 오죽하면 칼 슈미트가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대의제를 편제하고 최고의 대의제는 군주제라는 단언까지 하였을까. 하지만 이런 의제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해방 이후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5·10선거는 38선 이북의 거주자들에게는 선거인명부에 등록할 수 있는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의회가 만든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헌법재판소가 이 조항으로써 국가보안법의 헌법적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또 다른 가상대표의 예가 된다. 웨스트민스트가 인도를 대표하듯 남한의 헌법은 북한까지도 통할하며, 마찬가지의 수순을 거쳐 이제 헌법재판소는 도시의 대표가 절대적 지배권을 확보하는 국회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까지도 대표하게 되었음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헌법재판소의 결정 자체가 무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산술적 수준에서나마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애쓴, 나름의 진보적 판단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단순명료한 가감승제의 계산 속에서 미처 산입되지 못한 국민계정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시간에 묶여버린 노동자들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들, 가상대표라는 마술에 하냥 매몰되어 버린 지역의 생활정치, 아무리 외쳐도 국회의 의석에까지는 도저히 가닿지 못하며 대통령선거에서는 비판적 지지론에 한숨을 쉬어야 하는 소수정파의 목소리들, 전국정당제의 억압으로 인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역정당의 무망한 꿈들 ……, 이 모든 것들이 선거구인구획정의 평등이라는 산술계산을 넘어서는 질적 평등의 영역에서 우리의 헌법적 결단을 기다린다. 투표가 진정으로 같은 가치로 산정되는 것은, 선거인명부등재번호 1번, 2번의 투표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야간대학생인 갑돌이, 영농후계자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을순이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는 대의제를 구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의 등가성이라는 요청은 이런 다차원의 벡터공간에 직면할 때 비로소 산정가능하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재치 있게 처리한 표의 산술계산은 그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87년 헌법의 수명이 다해가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런 평면적 연산보다는 이 벡터공간 속에서 헌법이 제시하는 공간좌표를 제대로 짚어 나가는 고등수학의 묘를 발휘하는 헌법재판소의 모습이 더욱 더 절실해질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