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칼럼] 성소수자, 촛불과 만나다 – 정욜
[기고]
시민들의 광장이 정부의 전방위적인 공안탄압으로 빼앗긴 듯 보이지만, 여전히 촛불의 힘은 건재하다. 참여자수로 따진다면, 초창기보다 훨씬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촛불을 평가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명박 정부의 최근 행보이다. 진보단체 관계자들을 수배-검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터넷을 재갈 물리려 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은 이미 내팽긴지 오래고, 물가인상 –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핑계로 희생을 국민들에게 전가하려고만 한다. 그러다보니 미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촛불은 이제 이명박 정부 전체를 향하고 있다. ‘서민들의 분노’라는 휘발유가 촛불에 끼얹어질까봐 노심초사하며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경찰폭력’과 ‘공안탄압’으로 가까스로 버텨내고 있다.
소수자 – 광장 – 촛불
지금은 광장조차 만들기 힘든 상황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장은 참 재밌는 장소였다. 성소수자들의 상징이라고 하는 무지개 깃발 뒤에 유모차를 끌고 아이를 안은 가족들이 나란히 서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무지개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에 잘 띄는 무지개 깃발 주변에서 일행들을 만나는 등 사람들로 붐비는 집회현장에서 뜻하지 않게 이정표 역할을 해 왔다. 이름도 없는 무지개가 마치 배후세력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쳐다보며 우리들의 정체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익명성이 존재한다. 자유발언대에 올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이상 누가 어디서 나왔는지 쉽게 알지 못한다. 조금은 두렵고 불편했지만 적지 않은 성소수자들이 존재를 드러낸 채 무지개와 함께했다. 만약 광장에서조차 익명성에 기대고 있었다면 수없이 외쳤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라는 노랫말 속 국민의 범주에도 포함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보이지 않고 늘 법 테두리 밖에서 서성되고 있다 보니 광장을 함께 점유하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범주에 대한 별다른 인식없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커뮤니티 활동이나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성소수자들의 다채로운 활동은 자긍심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은 한다. 그렇다면 촛불 집회와 같이 불특정다수와 함께 공존하는 광장은 성소수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와 닿았을까. 처음에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낯선 사람들과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분노를 표현할 수 있어도 사람들마다 성소수자 이해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광장에 함께 하고 있어도 두려움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들과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인권사안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을 때 갸우뚱거리거나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누군가 차벽에 적어놓은 “이명박은 게이다”라는 글귀 속에서 일부 참여자들의 후진적인 성소수자 인권 감수성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촛불을 보며 ‘우리 문제가 아닌데’라며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성소수자들이 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소수자 인권현실에 있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관심할 것이다. 이런 전제가 있다 보니, 촛불에서도 성소수자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광장에서 편견을 발견할 때는 함께 광장을 점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청소년들은 우리(성인들)가 보호한다는 보호주의 관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애국가 속에서 느껴지는 국가주의 관점. 에이즈라는 질병과 비교하며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더욱 조장하는 모습.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는 예비군의 모습과 예비군의 등장에 환호하고 박수치는 일부 시민들의 모습 속에서. 광장이 오히려 일반 시민으로 규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분해내는 것이 아닌지 그런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도 다시 광장으로.
하지만 촛불로 비춰진 광장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무지개는 늘 자신감으로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불편해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광장을 공존하는 것이 처음에는 두렵고 낯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 멀리에서 무지개 깃발을 보고 반가움을 나타내는 성소수자들을 만났을 때는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무지개 아래에서 가지게 된 자신감은 주변에서 무지개 의미를 물어보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마주설 수 있게 하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성소수자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광장 속 무지개는 최소한 우리 존재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국민의 개념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사실 그동안 광장을 벗어나 있었을 때는 우리의 존재는 더 보이지 않았고 더 큰 차별과 편견에 허둥되었었다.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쉽게 체념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장과 촛불은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이다. 비록 성소수자 이슈가 핵심이 아니더라도 그 공간은 최소한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 평생 사회가 규정한 가정주부의 역할에 만족하고 살았어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경험함에 따라 이전처럼 살 수 없다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그리고 촛불에 참여한 시민들이 미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이슈가 아니더라도 촛불문화제 장소를 기륭전자나 KBS 앞에서 옮겨가며 지속해나가는 것처럼 시민들의 의식 변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광장을 포기할 수 없고, 소수자의 인권을 더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촛불 연대를 지속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지독한 공안탄압으로 이제는 촛불을 쉽게 켜지도 못하고 있다. 주말에 종로, 을지로 지역에서 전경들과 길가에 불법적으로 주차해 있는 전경버스를 본다는 것은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 이명박 정부와 국민들과의 물리적인 마찰은 불가피해 보인다. 서민들을 더욱 고통을 넣을 민영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물가인상과 경제위기는 서민들의 삶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제 제2의 촛불운동을 준비하고 시작할 때다. 우리의 광장을 되찾고, 그 광장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토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도 적극적으로 제안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벼랑으로 몰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성소수자들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 시민들과 역동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진출처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