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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통신] 경청의 힘 – 장여경(진보네트워크 정책활동가)

 

 

 

활동을 배우는 학원은 없었다. 큰 단체에서 체계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부당한지를 충격으로 알게 되었지만, 그 부당함에 맞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곳은 없었다. 지금도 늘 시행착오 인생이지만 처음에는 정말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다.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부딪히는 문제가 많았지만 도전하는 사람들도 그만큼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정권교체기였고 새로운 문제제기에 대해 경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보화라는 낯선 문제와 막연한 문제제기에 대해 성의있게 들어주는 이들을 만난 것은 문제를 다듬고 예각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글 때문에 형사처벌받는 일들이 많아졌다. 특히 이전까지 정치인을 주로 상대했던 선거법은 온라인의 정치적 의견도 선거운동으로 보았다. 2011년 헌법재판소에서 한정위헌으로 결정되기까지 평범한 누리꾼들이 선거사범으로 많이 소환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사태냐고, 온라인이 술렁였지만 제도와 정치인 가운데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변호사를 만났다. 누리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싸우는 언어를 제도의 언어로 잘 번역할 수 있는 법률가와 함께 활동하는 것은 운동에 큰 힘이 되었다.

경청하는 언론인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도 나의 행운이다. 기자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잘 듣는 사람이라는 설명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내가 만난 최초의 기자는 <인권하루소식> 기자였다. 인터넷 대안언론도 없던 시절 아무도 다루지 않는 사이버 검열 문제에 대해 일부러 찾아와 의견을 청해 듣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 후 발행된 지면을 찾아보니 우리 사회의 여러 ‘중요한’ 사건들과 우리 문제가 함께 다뤄졌다. 작은 집단에서 문제제기를 시작한 사람에게 언론 보도는 자신의 문제를 사회화할 수 있는 경로였다. 또 스스로의 문제를 객관화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정권교체 후로도 엘리트 관료들은 완강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압력은 과거와 달랐다. 여러 제도가 성찰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운 목소리와 문제들이 사회에 등장했다. 1961년 도입된 주민등록제도에 대한 새삼스런 문제제기도 그때 터져나왔다. 국회에도 경청하는 이들이 생겼고 대중들도 생소한 주장에 비교적 귀를 기울였다. 같이 들어주는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 변화를 위한 충분한 압력이 발생한다.

경청(傾聽). 귀를 기울여 듣는다,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듣는다는 뜻이다. 청자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경청이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는 사실 쉽지 않다. 낯선 것들일수록 그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 어렵다. 아무런 피드백이 없을 때 마음은 냉랭해진다. 자주 노출되면 그 문제를 이제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듣기를 멈추기도 한다. 내 이해관계와 부딪칠 때는 귀를 닫는다. 경청해야 할 대상과 소음을 구분하는 것도 피로한 일이다.

나도 경청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활동가는 아무래도 바깥으로 향하는 목소리를 내는데 익숙하다. 물론 바깥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경청하는 훌륭한 활동가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달려가다가 많은 것들을 지나쳐 보냈다. 마음 속에 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혐오의 정치가 부상하는 때에, 어떻게 서로를 경청하게 할 수 있을까

 

시대가 어둡다. 내 새된 목소리를 기꺼이 경청해 주었던 고마운 이들이 생각났다. 불빛이 희미할 때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큰 소리는 쉽게 들리지만 낮은 목소리에는 주의를 들여야 한다. 하지만 크게 소리가 나도 제 갈 길 가기 바쁜 날들이어서 그런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소수를 짓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떳떳함을 빙자하고 있으니 귀가 시끄럽기 이를 데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0대 총선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이번 선거를 잊지 못할 것 같다. “혐오의 정치”가 전면에 부상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동성애 반대, 이슬람 반대가 공공연한 공약으로 어느 정당의 선거 공보에 실렸다. 집권 여당과 제1야당의 유명 정치인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일부 대형 교회의 압력이라고는 하지만 혐오 정서를 바로잡고 그에 맞설 용기가 없는 정치에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혐오 정치를 막는 방법은 결국 그 말을 무색하게 하는 시민적 힘에서 나온다. 시민적 힘은 소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들에게서 구할 수 있다. 이것이 쉽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경청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달리지 않으면 나 자신부터 혐오하게 될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돌아볼 수 있을까. 외모도 학벌도 손쉽게 혐오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보다 더 혐오스런 존재를 발명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동성애이고 이슬람이지만 늘 장애인이었고 여성이었고 전라도였고 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말이 다르고, 외모가 다르고, 체취가 다르고, 관습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불평이 많다는 사실이 혐오의 이유가 된다.

그러면 안 된다는 질책은 우선 이성의 목소리이다. 법의 힘은 이성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마음이 움직이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경청이 필요하다. 어떻게 세상이 서로를 경청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글_장여경(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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