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통신]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연기 –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예전엔
그렇게 많이 보더니…….”
친밀한
사람들이 내게 자주 하는 말이다.
괜찮은
영화가 있다고 같이 보러 가자고 손 내밀 때마다 내가 단칼에 거절하기 때문이다.
왕년에
영화팬 아니었던 사람 없고 지금도 영화감상이 취미가 아닌 사람 찾아보기가 어렵다.
나 또한
둘째간다면 서러워할 영화팬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내리 다섯 편을 보는 일도 흔했다.
그런데
중년 언저리에서부터인가 영화 보기가 버거웠다.
‘나이
탓인가?’
‘나이와
영화가 무슨 상관이라고?’
나름대로
이유를 탐색했는데 결론은 싱겁게 났다.
슬프고
아픈 것을 견뎌낼 능력이 말라가고 있다는 거였다.
지독하게
슬픈 것을 보고 흠뻑 울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험이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우울감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됐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모욕과 굴욕이 통과의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영화관에 들어가면 두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워했는데,
이젠
숨쉬기가 버겁고 빨리 벗어나고만 싶어졌다.
나는
‘폐소공포증’이라는
나름의 병명까지 내 증세에 갖다 붙였다.
내
취향을 우월시하며 ‘저급’하다니
‘유치’하다는
등의 꼬리표를 붙였던 장르로 옮겨갔다.
결말이
‘해피엔딩’임을
확인하고서야 보게 됐다.
중간에
펼쳐지는 오해와 난관이 싫어서 그마저도 안 보게 됐다.
결국
남들이 비웃는 이상한 취향에 안착하게 됐다.
극장
근처에도 잘 안 가고,
드라마를
보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은 없게 된 것이다.
급속도로
화해와 개심,
사랑의
절정으로 결말지어지는 마지막 회만 반복해서 보는 게 취향이 돼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안 들어갈 수 없는 극장이 있다.
현실의
고통이 상영되는 곳이 바로 내 삶이고 내가 속한 사회이다.
시네마천국의
토토는 지루하고 힘든 현실을 편집할 수 있는 영화를 부러워했다.
현실의
고통은 편집될 수 없고 어떤 영화의 재현보다 더하다.
첨단
미디어의 시대에 노동자와 장애인 등은 난간에 광고탑에 다리 위에 매달려서야 자기 말을 전한다.
일하다
죽고 다치고 모욕당하는 게 눈 깜빡이는 것처럼 쉽게 자주 벌어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폭력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사건들이 죄다 하드코어 장르다.
문제는
여기에선 내게 요구되는 역할이 있다는 거다.
이
장르에선 주연이 못 되는 게 되려 운 좋은 거다.
하지만
주연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이 있다.
나는 내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기해야만 한다.
연기가
필요 없는 제일 쉬운 역할이 있다.
엄청난
고통의 목격자로서 그 생각만으로도 우울하고 살맛이 안 나는 상태,
죄의식에
푹 빠져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는 역할이다.
가해세력이
피해자와 피해자 편에 선 사람들의 무력감을 즐기는 걸 뼈저리게 느낄 땐,
목격자도
뭣도 아니고 극에서 슬며시 빠져나오고 싶다.
가해세력을
성토하면서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보기도 하지만,
나 또한
책임지는 행동이 없다는 데서 금방 공허해진다.
다시
무력감에 빠지는 역할로 되돌아온다. 제일 맡기
싫은 배역이지만,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배역의 역할에 전염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역할극에서 어떤 대사를 읊고 있는가?
나는
구토하듯이 성토와 저주의 말을 내뱉기만 하는 것인가?
‘말’을
‘말답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말’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복’하고 그
‘말’을 통해
서로 가까이 다가서게끔 하는가?
그런
반복과 다가섬을 통해 뭔가를 도모하게 되는가?
그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게 만드는가?
효과를
확신할 수 없어도 계속 가고 있는가?
이
전체의 극,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켜보는 충실한 목격자가 필요한 것 같다.
목격자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효과’의
방향성과 효과를 좌지우지할 힘을 갖고 있다.
이
과정은 결말만 보고 시시하다 말할 수 없는 드라마이다.
나는
쉬운 결말이 아닌 대하드라마를 지켜볼 마음으로 충실한 목격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혹시 ‘지겹다’
‘괴롭다’는 말로
고통의 당사자를 내쫓는 건 아닐까?
나는
은밀하게 그런 추방행위를 하는 집단에 동조하는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에서 맞닥뜨려야만 하는 내 속에서의 격렬한 부대낌의 경험을 생략하려 들지 않는가?
자신에
대한,
서로에
대한 이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무력감에서 빠져나오는 연기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의
영화 또는 드라마 감상 태도처럼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걸 내버려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시–보기’를
시도해야 할 것 같다.
글_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