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통신] 아버지의 산재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귀신에 홀렸는가.
그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일터에서 화상사고를 당하셨다. 바늘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바늘을 가지런히 정리하거나 불량품을 골라내고 완제품을 포장해서 나르는 일이
주였지만, 때로 용광로 앞에서 바늘을 굽는 일에도 투입되기도 하셨단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머릿속엔 바늘 제조 공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해도 아버지가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무심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이 크다). 불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은
고된데다 위험하기도 해서 너도나도 기피하는 일이었단다. 보호 장비는 일절 제공되지 않았고 사비를 들여 장갑을 사가야 했다. 더위가 좀 수그러들어
땀범벅은 덜하겠구나 싶었던 9월 초순. 그날따라 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기름이 잔뜩 묻은 장갑을 낀 채 불 앞에 섰다. 순식간에 불이
양팔에 확 옮겨 붙었다. 사고 당일에는 2도 화상쯤일 거라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 안에 들어간 화기는 아버지의 살을 기세 좋게 더
태워나갔다. 3도 화상. 병원에서는 이식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IMF 구제금용
시절, 젊음을 바친 회사에서 밀려난 후 아버지는 작은 인쇄공장, 아파트 경비업체 등을 옮겨 다니며 일을 해 오셨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평생 일해 얻은 집까지 날리고 빚을 갚느라 십년 세월을 보냈다. 예순 중반을 넘어서자 아파트 경비 일자리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24시간 맞교대를 견뎌내기엔 체력도 딸렸다. 몇 해 동안 형부 가게 일을 돕다 지난해부터는 다시 바늘공장에 다니셨다. 70대치고는 체력이 좋은
편이던 아버지를 눈여겨본 동네사람이 전무로 있던 공장이었다. 아버지는 이 나이에 자기를 채용해준 회사가 마냥 고마워 하셨다. “누구누구는 연금
받아, 월세 받아 놀러 다니며 산다더라.”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자식들 신세 지지 않고 제힘으로 벌어 살겠다던 아버지는 간혹 형편 좋은
친구분을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부러운 듯 한마디씩 내뱉곤 하셨다. “자식들 이만큼 키워놨으면 이제 너희들이 내 먹여 살리면 안 되냐.” 일이
너무 고된 날이었을까. 전화기 너머로 하소연을 하실 때면 나는 잠자코 듣고 있거나 급히 화제를 돌리곤 했다. 아버지의 노동과 형편을 알면 알수록
자식으로서 부담감만 커질 뿐이니 자세히 묻지 않는 게 속편했다. 활동비로는 나 혼자 살아내기도 빠듯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도 나이든 아버지를
위험한 일터에 내몰았다는 자책감과 앞으로 일을 못하시게 되면 어찌 생활하시나 하는 걱정이 함께 일었다. 쪼들리는 형편에 당연히 찾아들 마음이겠다
싶으면서도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사는 형편이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진료비였다. 화상이다 보니 진료비가 일천 만원을 훨씬 웃돌았다. 아버지는 산재보험 가입도 안 된 상태로 일하고 계셨다.
“내가 잘못해서 사고가 난 건데 사장한테 뭐라 할 수 있나? 공장에 큰 화재 안 나고 손해 안 입힌 게 그마나 다행이지.” 아버지는 산재 예방을
위해 ‘주의하라’는 말 말고는 해준 게 없는 회사를 원망하기보다 회사의 손해를 먼저 걱정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회사는 치료비를 다 물어줄
것처럼 나왔다가 산재 처리를 해주겠다 했다가 사보험에서 보장해주는 비용을 제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가 종잡을 수 없게 굴었다. 형님동생 하며
일자리를 소개해준 사람은 ‘친한 동네 동생’에서 ‘사측 관리자’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형님~ 기름 묻은 장갑 절대 끼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습니꺼. 형님이 사고를 내는 바람에 보험 가입 안한 사람들 다 내보내고 책임자는 감봉 조치까지 받았습니더.” ‘동네 동생’은 아버지의 실수와
그로 인한 사고로 다른 동료들이 입은 피해를 슬그머니 강조했다. 아버지가 완치 판정을 받고 남은 장해 없이 일터로 돌아갈 마음을 먹는대도
복귀하기 힘든 적대적 환경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고도 ‘왜 기계에 피를 묻혀 더럽혔냐’는 비난을 받으며
공장을 떠났다는 얘기가 옛날 얘기가 아니었다.
보수정당을 평생
지지해온 아버지는 산재를 입고 난 후, (내가 보기엔)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헬 조선’의 현실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한해 산재 발생율이
10만에 육박하고(은폐되거나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산재는 그나마 제외된 수치다) 2천명이 목숨을 잃는 나라. “사람이 일하다가 왜 죽나요?”
한국의 한 연구자가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산재사망률을 줄이는 방안을 찾고자 던진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상이 된 산재
사망이 다른 나라에선 이해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다. 아버지에게 보호 장구가 지급되었다면, 용광로 앞 제조 공정이 화상사고에 대비해 설계되어
있었다면 아버지는 지금 병상에 있었을까.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산재 승인이
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가?”
본인 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하다 다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반가워하던 아버지는 근로복지공단이 비급여 항목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고는 걱정이 태산이다. 비급여 진료비란 선택진료비(특진료), 4~6인실 이상 상급병실 이용료, 새로운 약품 사용이나 수술로 인한 치료비 등
산재보상에서 제외되는 비용을 가리킨다. 특히 중증화상 치료의 경우, 비급여 진료가 워낙 많아 산재로 처리된다 해도 개인 부담이 엄청나다. 암이나
화상 같은 중증질환이나 희귀성질환에 대해 본인부담을 낮춰주는 산정특례제도라는 게 마련되어 있지만, 이마저도 비급여 항목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기 몸에 장해가 남을지 말지, 앞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에, 반년 치 월급마저 진료비로 토해내야 하나
싶어 앞이 캄캄하다. 나중에 회사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면 진료비를 받아낼 수 있지만, 산재보험과 달리 소송에서는 본인 과실을 따진다는 얘기에
또 자책하신다. “이식수술을 받지 말아야 하나.” 개인이 특별히 청구한 것도 아니고 병원에서 필수라고 얘기하는 치료 앞에서 환자가 망설여야 하는
현실. 과잉/특별 진료가 발생했다면 국가가 병원을 상대로 진료비를 청구해야지, 왜 산재 노동자에게 비용을 물리는 걸까. 근로복지공단이 될 수
있으면 보험료 지급을 줄이려는 ‘국가보험회사’란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화상 전문 병원엔 일하다 다친 환자들이 즐비하다. 사측과
산재 처리, 진료비 부담을 두고 오가는 고성이 상처로 인해 내지르는 비명보다 더 크게, 더 자주 들려온다.
진료비 문제가
잘 해결되고 치료를 마치면 아버지가 좀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도 허약한 제도 앞에 흔들린다. 실업급여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65세
이전부터 계속 고용이 유지된 경우가 아니라면 65세 이상은 고용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진입은 어렵고 퇴출은 쉬운, 가난한 노년의 노동은
법의 얄팍한 보살핌마저도 받지 못한다. 일터로 복귀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고정 수입은 월 20만원도 채 되지 않는 노령연금이 전부다. 100세
시대, 아버지처럼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그러나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든 노인이 얼마나 많겠는가. 얼마 전 노인의 날을 맞아 대한노인회가
국가재정과 젊은층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복지혜택 수혜 기준 연령을 현행 65세에서 70세로 높여야 한다고 했단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나라와 모든 세대의 이익을 고려하는 참 어르신임을 보여주신 순간이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깟 복지혜택 따위 걷어찰 만한 재산이 있어야 ‘참
어르신’이 될 수 있는 모양이다. 65세의 김무성은 노인이 아니라 권력자다. 아버지는 노인이고, 노인은 가난하다.
노령연금을
처음으로 받았을 때 아버지는 안 그래도 지지하던 대통령과 여당을 더욱 칭송해마지 않았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아버지가 지지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을 바꿀지는 모르겠다. 다만 노령연금만으로는 노년의 자신을 지키기엔 이 나라의 안전망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점은 분명히 깨달으셨을 것 같다.
아님, 본인 과실이 있는데도 치료비의 일부를 내어주는 제도가 있는 이 나라에 지금까지처럼 감사해 하시려나.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