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통신] ‘입법의 홍수’, 무엇이 문제인가 –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1,922. 20대 국회 개원 후 100일 동안 발의된 법안의 숫자다. 국회의원이 300명이니까, 의원 1인당 6건 이상을 발의한 셈이다. 같은 기간 발의건수가 17대 265건, 18대 741건, 19대 1,406건이었으니, ‘역대급’ 기록이다.
17,822. 지난 19대 국회가 4년 동안 발의한 법안의 숫자다. 법안 발의 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대략 민주화 이후이다. 1996년 개원한 15대 국회에서 1,951건으로 1,000건 시대를 열었고, 16대 2,507건, 17대 7,489건, 18대 13,913건, 그리고 19대에서는 17만 건을 돌파했다.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1.7만여 건의 법안 중 최종 통과된 것은 7,441건, 약 42%에 불과하다. 1만 건이 넘는 법안이 폐기된 것이다. 폐기되는 법률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14대 국회 때는 139건에 불과했던 것이 계속 늘어, 19대 국회에서는 1만 건을 돌파하게 된 것이다. 법안이 최종 통과되는 비율은 17대부터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발의 건수 자체가 워낙 많다 보니 최종 입법된 건수는 많이 늘었다. 14대 때 764건이었던 것이 15대 국회에서 1,561건으로 두 배 늘어났고, 19대 국회에서는 7,441건에 이르렀다. 20년 만에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1,383. 현재 운용되고 있는 법률의 총 숫자다. 갑자기 숫자가 뚝 떨어졌다. 수많은 법안이 제출되고 폐기되지만, 현행 법률의 숫자는 생각보다 작다. 1996년 기준으로 941개였으니 증가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디다. 여기서 대부분의 법안 발의는 법률의 제정이 아니라, 기존의 법률을 개정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대 국회에서 “OO법안”이라는 의안명이 붙은 법안은 총 536건이 검색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통계자료를 대략적으로 정리해보면, 1) 법안 발의 건수와 통과 건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2) 발의된 법안 중 최종 통과되는 비율은 절반 이하이며, 3) 대부분의 법안은 개정 법률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법현황을 단순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법에 대한 적정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법안 발의 건수만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률이 자꾸 개정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통계자료는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19대 국회가 ‘놀고먹은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 동안 법안 제출에 관여하거나 기존 법안에 의견을 내기 위해 국회를 들락거렸다. 이 수많은 법안을 ‘참여자’ 내지 ‘감시자’의 역할로서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 숫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제출된 법안 중에는 ‘허수’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잘 만들어진 법안도 있었지만, 실적 올리기 용으로 제출된 것으로 의심되는 법안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단순히 자구 몇 개를 수정해서 법안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한심한 수준의 법안들은 어차피 통과되지 않고 폐기된다. 국회가 나름의 자정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 다행이다.
문제는 이러한 법안의 홍수가 엄청난 비효율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 사무처 법제실은 발의되기 전 법안을 사전 검토하는 역할을 하는데, 19대 국회 4년 동안 3만 건에 가까운 법안이 접수되었다고 한다. 법제관이 60명이라고 하니까 1인당 매년 125건을 검토한 셈이다. 법안이 발의된 후에는 국회 수석전문위원이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와 심사보고서를 내는데, 이들 보고서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그 수많은 법안을 모두 성의 있게 심사·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법안이 많다 보니, 입법에 대한 참여와 감시가 어렵다는 점이다. 공청회가 열리기도 하고, 입법예고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만, 수많은 법률이 언제 어떻게 발의되는지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전문영역임을 자처하는 분야에서도 소리소문없이 법안이 발의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정부의 행정입법이 법률의 취지를 무력화시키는 경우도 있어, 각종 명령의 제·개정에도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법률을 제외한 현행 법령만 해도 3,225개다. 요즘은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자체의 조례/규칙에 대한 관심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참고로, 2015년 기준으로 전국의 조례는 63,476개, 규칙은 23,687개다.
‘규범의 홍수’(flood of norms)는 이미 1980년대부터 나타나고 있는 현대국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이지만, 한국의 특징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든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다는 것에 있다. 그만큼 부작용과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규범의 홍수 자체도 문제지만, ‘입법의 홍수’는 또 다른 문제다. 규범의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입법의 홍수 자체가 그 자체로 비효율을 초래하고 시민의 참여와 감시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19대 국회가 끝날 무렵 언론과 시민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의 실적에 대한 다양한 방법의 질적 평가가 시도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이런 감시/평가 시스템이 의원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0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발의 건수 신기록을 수립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론과 시민사회가 기존 법률안 재활용, 중복 발의, 단순 자구수정 등으로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의 ‘꼼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맹폭을 퍼부었다. 입법의 홍수가 본격적으로 문제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비판해도 국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시민단체가 법안발의건수 등으로 국회의원을 의원들을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경이다. 그때만 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외부의 감시·평가가 국회를 바꿔 놓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16년 현재 놀랍게도 우리는 ‘입법의 홍수’라는 새로운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시민사회의 힘이었다.
글_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