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통신] 화장실과 열등함의 각인 –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가을이 되니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굴리거나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한강변이 북적인다. 한강변에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구조물을 꼽자면 단연 화장실이다. 처음에는 간이화장실 형태의 외관 탓인지 불결할 거란 선입견에 선뜻 들어가게 되질 않았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깔끔한데다 화장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오호 제법인데?’ 호기심이 발동해 법률을 뒤져보니 공중화장실의 설치와 점검 의무를 규정한 법률(<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이 따로 있었다. 시․군․구에 운영 자문기구도 둘 수 있고, 화장실에 관한 연구와 화장실 문화 발전을 위한 협회 설립도 가능하고, 화장실 설치나 개선을 위한 보조금 지급까지 가능하단다. 몇 해 전, 여성 대변기 수를 남성 대․소변기의 합보다 많이 설치하도록 의무화한 조항이 삽입된 사실도 이번에야 알았다. 공중화장실이 갈수록 청결해지고 여성화장실 규모가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불특정 다수가 간혹 이용하는 공중화장실에 관한 법적 기반도 이만큼 튼실한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화장실을 마주해야 하는 이들의 처지는 왜 법이 외면할까. 10여 년 전 건설노동자들이 건설현장 내 화장실과 식당을 설치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힘겨운 싸움을 벌였던 일이 떠오른다. 모래바람 속에서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쇳가루․시멘트가루 날리는 공사장에서 손 씻을 세면장 하나 없는 형편도 형편이지만, 남녀 구분은커녕 문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던 심경이 어떠했을까. 수많은 노동자가 잡혀가고 일자리를 잃을 각오로 싸운 끝에 <건설근로자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화장실 설치가 의무화된 것이 2007년이다. 화장실 하나 짓도록 하는데 무려 5년이나 걸렸다. 법은 개정되었지만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간이화장실 위주로 화장실이 설치되었지만 문 앞에서 눈과 코를 찡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청결상태가 엉망이다. 한 건설노동자는 겨울이면 칼바람에 엉덩이가 찢어질 정도의 고통이 느껴진다고 한다. 농․축산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형편은 훨씬 더 참혹한 모양이다. 화장실이 아예 없어 인근 밭에 구덩이를 파고 대소변을 봐야 하는 이들도 있다 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에 구덩이를 팔 때, 칼바람 속에 바지춤을 내릴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고객용 화장실(왼쪽)과 직원용 화장실(오른쪽)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같은 건물 안에서도 분리된 화장실로 매일 불평등 앞에 마주서야 하는 이들도 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판매직 노동자들은 고객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볼일을 볼까?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 뒤편에는 화려한 조명에다 바닥에 물기 하나 없이 깔끔한 고객화장실과 달리 좁고 허름한 화장실이 기다리고 있다. 고객의 눈에 띄지 않는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화장실은 냉난방도, 환기도 잘 되지 않을뿐더러 재고 상자가 쌓여있기도 하단다.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학교에서는 교직원 화장실 몰래 쓰는 학생들을 잡아내기 위한 전쟁이 매일 벌어진다. 학생들은 왜 자꾸만 교직원 화장실을 ‘침범’하는 무모한 짓을 저지를까? “거긴 붐비지 않잖아요. 온수도 나오고 비데도 있고 화장지도 있고 비누도 있고!” 교직원 화장실을 몰래 쓰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항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는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다. 가만히 보면 청소년수련관과 같은 청소년 이용 시설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직원 화장실과 학생 화장실의 분리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이런 일들이 다만 화장실 설치와 관리에 드는 비용을 아끼느라 일어나는 일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2차대전 말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룬 영화 <사라의 열쇠>에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1만3천여 명이 경륜장으로 잡혀온 뒤 수용소로 이송되는 장면이 나온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사라의 청은 무참히 짓밟힌다. “그 자리에서 싸라!” 버젓이 있는 화장실을 두고도 이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끌려온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주어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동시에 학살자들의 입장에서는 ‘천하고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수록 인간을 살육한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는 방도’이기도 했을 테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과 학생들에게 허락된 저 따위 화장실은 비용보다는 열등함을 각인시키는 ‘의례’와 더 깊이 관련돼 있다. 매일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그분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한 나의 열등함을 몸으로 느끼고 절로 움츠러드는 이들이 있다. 저 따위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은 애초에 천한 사람들인데 저들을 함부로 대한다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무심해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정치다. 나와 이웃들이 어떤 화장실을 허락받고 있는지에 두루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화장실 앞에서 존엄이 곤두박질치는 일을 막기 위해 법은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글_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