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포커스] 부양의무자기준 해부
1. 들어가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세 모녀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만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지도 2년이 넘었다. 세 모녀의 죽음은 우리에게 소득원을 잃었을 때 최후의 보루로 기능해야 하는 사회안전망이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망은 망이로되 사람을 받아내기 위한 망이 아니라 떨어뜨리기 위한 망이다. 줄을 간신히 붙잡고 살아남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2011년 기준으로 노인 중 기초생활수급률은 6.7%이다. 노인의 최저생계비 기준 빈곤율이 30% 내외임을 감안할 때 노인수급률은 1/4에 불과하다. 노인뿐만이 아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면서도 공공부조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빈곤가구의 규모는 2010년 기준으로 400만명이 넘고, 이 중 부양의무자기준으로 공적 부조에서 배제되는 인구는 117만명으로 추산된다. 사각지대는 공공부조를 받는 범위보다 오히려 넓다.
이러한 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부양의무자기준은 오래 전부터 사각지대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어 왔지만 부양의무자기준을 페지하자는 요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예산부담에 대한 우려이다. 그 와중에 외면당하는 것은 인간다운 최저생활조차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비난의 화살은 부양의무자가 있는데도 국가에 손을 벌린 사람에게 돌아간다.
2016. 6. 14. 국회의원회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부양의무자기준과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이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공감,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재단법인 동천, 화우 공익재단, 성균관대 로스쿨 리걸클리닉 ‘복지사회를 위한 변론’이 주관하고 남인순 의원이 주최한 이 토론회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의 위헌성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하에서 토론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부양의무자기준의 문제점을 정리해볼까 한다.
▲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부양의무자기준과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 토론회 현장
2. 부양의무자기준이란?
부양의무자기준이란 공적 부조를 받기 위해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을 요구하는 조건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을 요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양을 받지 못하다”를 “부양을 받을 수 없다”와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다. 부양받지 못하다는 객관적 사실 외에도 가족관계가 해체되었다는 등의 사유에 대한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실은 가족으로부터 부양을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실제 소득은 “소득인정액”에 반영되어 소득이 최저생계비 미만일 것으로 요구하는 수급자격요건 해당여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별도의 부양의무자요건을 둔 것은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부양받을 수 있는 사람”과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하고, 부양을 받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구별하겠다는 취지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부양의무자기준은 결과적으로 수급(신청)자에게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넘어, 부양의 잠재적 가능성조차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지우게 된다.
부양의무자의 부양능력은 부양의무자의 사정임이 분명하다. “부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정은 어떨까? “부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부양의무자가 부양의사와 능력이 있음에도 부양권리자가 부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사정을 의미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부양의무자’가 부양을 할 수 없거나 부양의사가 없는 ‘어떠한 사정’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결국 ‘부양능력’이나 ‘부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나 모두 부양의무자의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정을 수급요건으로 삼음으로써 수급(신청)자인 부양권리자에게 증명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타인의 사정을 행정작용의 요건으로 삼는 입법례가 과연 또 있을까?
3. 부양의무자기준을 가족간 부양이나 효의 실현을 위해 존치할 필요가 있는가?
일각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은 가족간 부양의 실현 또는 효와 같은 미풍양속의 보존을 위해 존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소개한 토론회에서 보건복지부 공무원은 “부양의무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물론 가족간 부양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국가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급(신청)자가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을 수급요건으로 규정한다 해서 가족간 부양이 장려되거나, 부양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마음을 바꿔 부양을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간 부양을 받지 못하는 수급(신청)자에게 “사적부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공공부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양의무자가 부양을 임의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부양권리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가족간 부양이나 효의 실현을 도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국가가 부양의무자에게 직접 부양료를 청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양의무의 실현을 강제하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인간의 부양의무 이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할 것인지 여부는 공공부조가 필요한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 중 하나인 부양의무자기준과 직접적 관련이 없고, 별도의 고려가 필요하다.
나아가 법적으로 강제되는 부양의무의 범위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부양의무 이행 강제로 공공부조와 같은 수준의 생활이 보장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4. 결론
이상 본 바와 같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잠재적 부양가능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수급(신청)자와 그렇지 않은 수급(신청)자를 구분하여 후자에 대해서만 수급자격을 인정한다. 그러나 잠재적 부양가능성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양을 받고 있지 못함이 명백한 이상 잠재적 부양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공공부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공공부조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사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합리적 근거가 없는 차별이다.
예산상 부담은 부양의무자기준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부양을 받지 못하는 이상 부양의무자가 있든 없든 실질적인 차이가 없고, 따라서 한 쪽에 대해서만 예산을 특별히 아껴도 된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간 부양의 “가능성”은 예산을 아끼기 위한 보기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글_박영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