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월례포럼- 세상을 바꾸는 용기있는 선택, 공익제보자
내부고발자 vs 공익제보자?
내부고발자와 공익제보자. 단어의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내부고발자는 조금 어두운 느낌이다. 그리고 비밀스런 분위기이다. 법적 분쟁과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고발이란 용어는 괜히 움츠러들게 만든다.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내부고발자란 용어를 최근에는 공익제보자로 바꿔서 부르자고 하는 움직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내부고발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비밀스럽고 어두운 분위기를 벗어나 공익제보라는 이름으로 그 행위를 보다 높게 평가하기 위함이다. 일반인들에겐 이와 같이 단어 하나 바꿔 부르는 것만으로도 선구자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남들보다 한걸음 앞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곳에는 내부고발이든 공익제보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용기이다.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김용환 대표와 함께한 이번 월례포럼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보를 하면 나는 다친다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2003년 감염혈액 유통 사건. 대한적십자사의 직원이었던 김용환씨 등 4명은 혈액사업본부가 에이즈와 BㆍC형 간염, 말라리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을 환자 수혈용과 의약품 제조용으로 유통시킨 사실을 언론에 제보했다. 이후 정부는 혈액유통 과정의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2004년 혈액ㆍ장기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5개년 개선 계획을 수립했다. 또 사무관 1명이 전담하던 혈액감시 업무도 2개 부서를 신설해 담당케 했다. 다쳐도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용환 대표가 제보를 할지를 고민한 기간은 4개월 정도. 대부분의 공익제보자들이 제보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높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고 한다. 제보를 하지 않고 조직에 순응한다면 지금까지의 안정된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제보를 하는 순간 어떤 방법으로든 불이익은 따르게 마련이다. 해고를 당하면 당장 가족들은 생계가 막막해지니……며칠을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양심의 “양”은 “良”이 아니라 “兩”이다. 마지막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의미로. 한참동안 고민 하였지만 그는 결국 혈액감염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혈을 받는 사람들은 보통 중환자나 노약자 혹은 임산부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상황보다 면역력이 훨씬 약해져 있는 상태이다. 한 번의 수혈로 인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지금 당장은 나와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느 순간 우리 가족이 수혈을 받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제보를 결심하게 되었단다. 많은 사람들은 공익제보자들의 동기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제보한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이것이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그가 왜 제보했는지를 제일 궁금해한다. 이중성이다. 공익제보라고 박수를 쳐주면서도 그들이 왜 제보하였는지 그 동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 동기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폄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양심(良心)만을 동기로 요구한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면 그들의 시선은 비난으로 바뀐다. “어쩐지……”라면서. 그러나 공익제보를 하고 나서 겪는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단순한 이해관계나 불만을 이유로 제보를 하기에는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가 너무 비싸다.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영역은? 2002년 부패방지법이 제정되고 2005년 개정되면서 우리나라도 공익제보자에 대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부패방지법은 신분보장, 신변보호에서부터 포상 또는 보상금 지급까지 규정하고 2005년 개정에서는 입증책임과 관련한 불이익추정규정도 신설했다. 가히 선진적인 입법이라 할 만한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 대상이 공공기관만이다. 그럼 민간영역은 어떻게 보호할까? 현재로서는 “각자 알아서”가 가장 정확한 답일 것 같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정부지원금을 비슷하게 받아도 공립학교 교사들은 보호가 되지만 사립학교 교사들은 보호가 안된다. 서울대학교 교수는 부패방지법의 보호영역 안에 있지만 연세대학교 교수는 아니다. 민간영역까지 국가가 관여하려 한다면 민간 부분의 자율성을 침해하게 되는 것이 민간영역을 제외시킨 이유라 한다. 오늘날, 이 시대에 공공기관과 민간영역이 정확히 구분된다고 보는 시각이 놀랍다. 그럼 국가의 예산이 투입되는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열매만 달게 먹고 여기에서는 자율성을 외칠 것인가. 미국, 영국, 일본은 보호되는데 우리만 시민의식, 자율성에 대한 열망이 뜨거워서 민간영역을 자율적으로 내버려두는 것인가. ……회사와 하청업체간 부품가격 커넥션 비리를 고발했던 LG전자 전 직원 정국정씨는 무려 8년간 사문서 위조, 무고와 위증교사 등의 혐의를 놓고 회사 측과 민ㆍ형사 소송을 벌였다. 그는 민사상 손해배상을 받아냈지만, 해고통지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 당시 감리원이었던 정태원씨는 부실공사를 문제 삼았다가 건설업체의 협박을 받고는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20여 차례나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학비리를 고발했던 진웅용씨는 “할머니가 공익제보의 충격으로 숨진 이후 가족들에게서 ‘네가 할머니를 죽였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과 관련되면 박수를, 자기와 관련되면 밀고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꼭 일러바치기 좋아하는 애들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으레 그 어린이들이 “고자질”을 하면 선생님은 이렇게 야단친다. “고자질하는 것은 나쁜거예요”. 이런 장면은 현실에서도 어린 나이에는 여러 차례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어떤 경위나 이유로 이야기를 하였는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생각을 하고 있다. 고자질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이런 시각은 공익제보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공익제보자들은 소속 조직은 물론 자신을 배신자로 보는 주변의 불편한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유교적인 온정주의는 결국 OECD국가중 부패지수 23위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이 쯤 되면 김용환 대표가 “계몽”이란 표현을 쓴 것을 이해할 만하다. “계몽”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을 뜻한다. 전자일까 후자일까. 국민들의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앞서 얘기한 이중성과는 또 다른 이중성이다. 그들은 자기와 관련이 없는 일에 관해서는 넉넉하게 박수를 보낼 줄 안다.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고 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내심은 뭔가 석연찮다. 이런 점은 자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공익제보가 이루어지면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 그들은 배신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따돌린다. 고자질한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는 이상한 우월 의식으로 도덕적 위안을 삼는다. 바뀌어야 한다. 문화적인 문제로 돌려버리기에는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크다.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드리고 싶다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은 사람으로 치면 신생아에 가깝다. 모임이 결성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공익제보자 지원에 관한 인프라 구축도 진행 중이다. 왜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혼자 감당하기도 벅찬 일을 겪었을 텐데 왜 굳이 남의 일에까지 나서려고 할까. 김용환 대표는 시민사회가 자신에게 도움을 준 만큼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받은 “빛과 소금상”, 한국투명성기구에서 받은 “투명사회상”이 그에겐 남다른 의미이다. 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행동을 사회에서 인정을 해 주는 것. 자신이 한 행동이 옳은 것이었다는 점을 시민사회가 알아주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가 그에게 준 용기. 그가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빛과 소금 앞으로 이어질 공익제보자들이 겪는 고초를 최소화하고 그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여 토탈(total)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김용환 대표가 지향하고 열망하는 것이다. 그가 직접 경험해보았기에, 공익제보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는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줘야 하는지를 안다. 그의 뒤에 서서 박수를 보내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만을 치고 있기에는 공익제보자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혜택을 보는 점이 너무나 많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불안……일정 부분 우리가 짊어져야 할 것들을 그들이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박수가 아닌 그들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야 할 때이다. 그들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