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변의 변] 객관성이 담보되는 난민심사를 위하여 – 박영아 변호사
지난달 터키
해안에 떠밀려온 아일란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장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아이가 왜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밤중 위험한
항해를 감행해야만 했을까? 사진을 본 모든 이들이 품고 있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난민들을 태운 배들의 목적지인 유럽에서의 반향은 더욱 컸다.
동부유럽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들의 입국을 허용키로 한 독일에는 매일 10,000명의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독일에 입국하는
난민들의 수가 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14년 난민신청자수가 약 20만명이었고, 당시도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팽배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 1994년부터 누적된 난민신청자 수는 2015.
6.기준으로 11,172명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언론에서도 난민에 관한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민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지금 지원하고 있는 난민신청자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풀어낼까 한다.
A는
2012년부터 3년 넘게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어 있다. 전에 다른 명의로 입국하였다가 강제퇴거당한 이력이 있고, 난민신청할 때 그 사실을
바로 밝히지 않았다 하여 강제퇴거명령을 받고 구금된 것이다. 강제퇴거이력을 바로 밝히지 않은 것이 난민신청이 기각된 주된 사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의 입국이력은 그의 난민신청사유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 후 문제가 생겨 본국을 탈출하게 된 경위에 관한 그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적이다. 그는 난민신청을 할 때 통역이나 도와줄 사람이 없어 난민신청서 접수를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만 세 번이나 찾아가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고, 신청서와 진술서를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할 것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일단 난민신청사유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아갈 때 난민신청자가 통역해줄 사람과 같이 안 왔다는 이유로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고, 영어나 한국어가 아닌 신청인의 모국어로 작성된 난민신청서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수긍되는 설명이었다. 그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면회하러 갈 때 한겨울에도 양말 없이 슬리퍼만 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양말이 한 켤레밖에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빨래하는 날에는 신을 양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항상 괜찮다고 한다. 보호소는 적어도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해준 내용 중 부정확하거나 허위사실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난민신청사건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그의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로지 난민신청사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항을 이유로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모두 부인하는
것은 객관적 난민심사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B는 을국
출신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본국에서 이단으로 취급되고 있는 소수종파에 속한다. 그는 여권상 종교가 이슬람으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난민신청이 기각되었다. 그는 여권 발행은 대사관에서 했고, 왜 이슬람으로 기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자기가 속한 소수종파도 이슬람에 속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권을 다시 발행받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친형이 독일에서 난민인정을 받았다는 서류도 제출했지만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에서도 여권기재가 계속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대사관에 가서 종교란을 수정해달라고
했다. 대사관 직원은 해당 부분을 화이트로 지우고 B의 종교란을 수기로 정정한 후 도장을 찍었다. B는 이렇게 해서 정정된 여권을 항소심 법원에
제출했다. 항소심 판결에는 여권 변조가 기각사유로 추가되었다. B의 사건을 직접 맡게 된 것은 상고심에 계류중일 때였다. 형의 난민인정서류에
기재된 독일 변호사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이메일 주소가 하나 나와서 무작정 메일을 보내보았다. 의뢰인에게 연락해서 동생이 한국에서
난민신청했는지, 내가 동생의 변호사인지 확인하고, 맞다면 판결문을 보내달라는 취지였다. 얼마 후 독일 변호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자신의 의뢰인이
모든 사실을 확인해주었다는 것이다. 독일 변호사는 운 좋게도 생면부지의 한국인으로부터 온 메일을 무시하지 않았고, 사건이 이미 완료되었고 통역이
필요함에도 의뢰인에게 다시 연락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B는 재신청 결과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다.
C는 B와 같은
소수종파에 속한다. 해당 소수종파는 세계 각국에서 지부를 두고 있는데 한국지부에 속한 신자는 약 40명으로 상대적으로 소규모이다. C는
2001년 한국 입국 직후 한국지부에 가입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수년전부터 대구지부 대표를 맡고 있다. C는 2009년 난민신청을 하였다.
처음 입국 당시에는 한국에 난민제도가 있는 줄 몰랐기 때문에 바로 신청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2012년에 그의 난민신청을
기각하였다. 여권 종교란에 종교가 이슬람으로 기재되어 있어 해당 소수종파에 속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오로지 난민신청사유를 만들기
위해 (주류종파에서 이단으로 취급하며 혐오하는) 소수종파에 가입하여 신자행세를 하고 대구지부 대표까지 맡았다는 것이다.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
법원의 판결도 다르지 않았다. 항소심에서 2000년대 초부터 국내 지부에서 활동한 사진들을 찾아내 증거로 제출했다. 그 결과 항소심에서 드디어
소수종파 신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본국과 한국에서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해왔음을 증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판결문에
“적극적” 종교활동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종교활동이 박해로 이어질 수 있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의 종교활동의
“적극성”을 판단할 때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은 고려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구지부 대표를 맡은 것 이상의 “적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다만 여권 종교란에 종교가 이슬람으로 기재되어 있고, “신체적ㆍ물리적 침해를 받지 않았다고 볼만 한 자료가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본국을 탈출한 것인데, 실제로 “신체적ㆍ물리적 침해” 받아보아야 난민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소수종파 신자임이 확인되었음에도 여전히 여권 종교란 기재에 무게를 둔 사유도 명확하지 않다.
D는 북부
아프리카 출신 난민신청자이다. D는 성적 지향을 사유로 난민신청을 하였다. 미등록 체류하다 단속이 되어 외국인보호소에 수용된 후였다. 본국에서
겪어온 일들에 관한 그의 진술은 절절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불인정결정을 받았지만, 법무부에 이의신청을 한 결과 다행히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고
외국인보호소에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난민으로 인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했다. 상대방은 진술의 신뢰성과 박해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쟁점을 정리하기 위하여 인도적 체류허가 사유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지만, 법무부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심에서 승소하였다. 사건은 지금 항소심에 계류 중이다.
난민심사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다른 나라에서 탈출한 신청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가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타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의 예측을 본질로 하는 것인 만큼 쉽지 않고, 무엇보다 생소한 작업이다.
나아가, 난민신청자의 진술 외에 구체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신청자가 증거를 미리 확보해놓거나 탈출 과정에서 챙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위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청자의 여권기재, 난민신청시기, 출입국이력, 입국경위 등 객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난민신청사유와 직접적 관련성이 없는 사실에 지나친 무게가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심사의 객관성을
해친다.
난민사건에서
신청자의 진술이 핵심적 증거가 된다. 물론 난민신청자 진술은 항상 액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신빙성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신빙성이 판단에 심사하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신빙성을 배척할 때 객관적이고 명확한 이유의 제시가 중요한 이유다.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시켜 봐라”는 식의 태도는 오로지 심사자 본인의
개인적 경험과 주관에 의존하겠다는 것으로 객관성 있는 접근이라 볼 수 없다.
난민심사는 본디
매우 불충분한 도구를 가지고 매우 어려운 과제(난민신청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고 장래의 박해가능성을 예측)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움은 난민의 정의가 요구하는 박해가능성에 관한 상당히 낮은 수준의 입증정도로 상당부분 완화된다. 난민협약이 요구하는
것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이에 대해 “심리적 상태이며 주관적 조건인 두려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이라는 조건이 추가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난민신청자가 박해를 두려워하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면, 박해가 발생할
확률적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10%의 박해가능성만 인정되어도 난민으로 인정된다는 것이 다수 협약 당사국의 확립된 판례이다.
달리 말하면, 박해받을 가능성이 박해받지 않을 가능성보다 낮더라도, 실제적 가능성이 있다면 난민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행의 실무에서는
박해가 임박했다는 확신이 들어야 안심하고 난민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언어적 배경이 다른 나라에서 장래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판단할 때 확신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물론
난민신청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난민협약상 난민요건의 핵심 중 하나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우려”이다. 신청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판단하라는 것은 아니다.
난민인정은
난민신청자에 대한 포상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재량사항도 아니다. 난민신청자가 난민협약에서 정한 난민요건에 해당하는지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할까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돌려보내는 일이다. 난민여부는 관상으로 알 수 없고, 점을 쳐서도 알 수 없다. 진실도 100%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런 만큼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객관적 근거와 기준을 가지고 난민심사를 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글_박영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