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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변의 변] 도로는 누구의 것인가



 

 한 종교단체가 신도들의 종교의식을 치르는 건물을 새로 건축하려고 한다. 새 건물을 위해 산 땅에 건축하려고 보니 한번에 4천여 명의 신도가 모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왕 새로 짓는 것, 6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게 지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미 마련한 건축부지에서는 설계가 나오지 않는다. 건축부지 옆의 도로는 어떨까? 도로 지하 공간을 이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도로점용은 상하수도관, 철도나 통행시설을 위해 허가가 나왔다는데, 종교시설 건축을 위해 허가한 적은 없다는데, 어떻게 하나. 기도의 힘이었는지 도로 관리청인 자치구청장은 도로 밑의 8층, 연면적 5,700여 제곱미터 공간에 종교시설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로점용허가를 내어준다. 도로점용의 목적은 ‘지하실’ 설치이다. 신성한 의례의 공간이 지하실로 탈바꿈하는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옥외집회를 열려고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인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대한문까지 행진할 계획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첫 3년 동안 직장을 세 번만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외국인근로자 사업장 변경 개선지침’을 새로 만들어 이주노동자에게는 구인업체 명단을 주지 않고 구인업체만 노동자에게 연락할 수 있게 하였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지침으로 피해를 겪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집회는 한 번의 불허가로 법정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역에서 한국은행 로터리를 거쳐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길을 바꾸고 무사히 열리게 된다.


 



 청명한 가을날 휴일에 만난 지인이 불만을 토로한다. 한낮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 때문에 광화문 주변 교통이 통제된단다. 왜 사람과 차들이 덜 다니는 새벽에 마라톤 대회를 하지 않고 차량 이동이 많은 낮에 마라톤을 하느냐고 답답해한다. 차가 막히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지인의 집은 광화문 근처에 있기 때문에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 자주 있는 일이다.


 



  근래 내 주위에서 ‘도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이다. 언뜻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일들은 공통의 질문을 던진다. 도로는 누구의 것인가, 누구를 위한 땅인가?


 



 사전은 도로의 뜻풀이를 ‘사람, 차 따위가 잘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비교적 넓은 길’로 하고 있다. 법전에는 도로가 일반인의 교통을 위하여 제공되고 종류에 따라 국토해양부 장관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관리한다고 씌어 있다. 도로는 나라 땅을 이리저리 연결하면서 또 나누기도 하고 사람과 자동차를 이동시킨다. 도로 표면뿐만 아니라 도로의 상공과 지하 공간도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땅은 더 늘어나지 않지만, 건축기술이 발달하니 도로의 상하를 입체적으로 활용하여 도시나 지역공동체를 위한 인프라를 설치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 지하에 개인이나 사적 단체의 이익을 위하여 교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건물을 짓는 것이 허용되는가? 그 단체가 특정 종교단체라면 정교분리의 원칙을 채택한 우리 헌법을 거스르는 문제가 없는가?


 



 도로는 비단 교통만을 위한 공간인가? 옥외집회나 시위를 하려고 나선 이주노동자나 언론이 받아주지 않는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에게 도로는 어떤 장소인가? 거리홈리스나 노점상처럼 생존을 위한 사적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에게 도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장소이기도 하고, 생존을 위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때로 도로는 스포츠나 퍼레이드와 같이 문화적인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열린 장소로 바뀌기도 한다.


 



 지금 도로 위에 선 사람이 비록 내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언젠가는 그 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공공재인 도로의 표면, 지상과 지하 공간이 공동체의 일원인 나를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도로가 공공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도로는 누구의 것인가?


 


 




글_차혜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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