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와 안판석
봉준호 감독이 지난 5월 25일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봉테일(봉준호+디테일)’로 불리는 감독을 축하하며 수상일을 ‘봉축일’이라고, 배우 송강호와 함께 ‘호호 콤비’이라고 부르는 말이 유행하는 와중에, ‘표준 근로계약서’라는 말도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스태프와 표준 근로계약서를 썼고 ‘나의 예술적 판단으로 근로시간과 일의 강도가 세지는 것이 항상 부담’이었는데 ‘표준 근로계약서에 맞춰서 촬영하는 게 편했다’는 감독의 말 때문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힘인지 영화계 표준 근로계약서 도입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다. 계약기간, 초과 근로수당, 4대 보험 가입과 같은 내용이 담긴 표준 근로계약서 작성은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점차 늘어났으며, 그에 앞서 2005년 영화 제작, 연출, 조명, 촬영 등 영화 스태프가 가입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이같은 영화계 노동환경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방송계는? 몇 년 전 안판석 피디는 드라마 ‘밀회’를 마친 후 ‘연출가로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충분히 자고, 충분히 쉬며 촬영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그 어떤 성취보다 자랑스럽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모든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일상의 행복이 무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질, 성공과 실패 이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거라고 본다. 철저하게 쉴 시간을 주고, 잘 시간을 주고, 씻을 시간을 주고, 노닥거릴 시간을 주고. 그걸 지키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내가 잘 한 것은 그걸 지켰다는 거다.”(맥스무비, 2014. 5. 20. 인터뷰) 당연하게 들리는 이 얘기가 안판석 피디의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이와 같은 사례가 극히 예외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흔히 ‘사람을 갈아넣는다’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조차 무서운 말이지만, 초장시간, 고강도, 저임금 노동에 익숙한 한국 사회는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람을 갈아넣어’ 만들었다고 서술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방송현장에서는 집합부터 촬영 종료까지 하루 20시간 이상의 노동, 밤샘 촬영이 일상이고, 새벽에 퇴근하자마자 아침에 곧바로 다시 출근해야 해서, 한 화면이 사라지면서 다른 화면이 겹쳐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을 이르는 ‘디졸브’에 빗댄 ‘디졸브 노동’이 방송계 스태프 노동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오늘 본방사수하려는 드라마가 ‘사람을 갈아넣는’ ‘디졸브 노동’의 산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청자의 자세로 방송을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작년에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 지부가 창립됐다. 방송 제작 현장의 스태프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법의 보호를 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공감도 방송스태프 노조에 힘을 더하고 있다. 영화계의 노동환경이 영화산업노조의 오랜 활동으로, 정부와 영화계를 선도하는 기업의 참여로, 표준계약서 도입과 같은 제도 개선으로 달라질 수 있었던 것처럼, 방송스태프 노동자의 노동 현실에도 변화가 오기를 기대한다.
예술은 노동이다. 예술산업에도, 대중문화 예술산업에도 노동자가 있다. 인권을 양보하지 않고도, ‘사람을 갈아넣지’ 않고도 예술은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와 대중적 성공이 가능하다. 봉준호 감독과 안판석 피디가 이를 보여주었으니, 다음 차례는 개인의 의지에만 기대지 않는 제도의 변화다.
–차혜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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