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변의 변] 선덕여왕과 마키아벨리
드라마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제작자들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상당 부분은 그 덕분에, <선덕여왕> 속 캐릭터들의 현재성이 살아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매혹이 오늘에 지속되는 것과 같은 방식일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16세기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종교 없는 정치를 적극적으로 사고했다면, <선덕여왕>은 고구려, 백제와 패권을 다투는 신라에서 신권정치로부터 왕권정치로 이행하는 과정의 정치를 무대로 하고 있다. <선덕여왕>을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서 떠올려보는 질문은, 신라의 상황에 놓인 마키아벨리라면 『군주론』을 누구에게 헌사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대답은 ‘미실’이 아닌, ‘덕만’일 것이다. ‘미실’에게는 없고, ‘덕만’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마키아벨리적 군주의 핵심이다. 흔하게 이해되는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전제정과 권모술수의 처방전을 제시하는 전제군주의 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주’의 형상을 제시하고, 부도덕한 현실에서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군주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핵심은 군주의 처세를 논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의 군주가 새로운 것은 ‘대중’(인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마키아벨리의 모델에서 군주는, 귀족과 인민 사이의 갈등(계급투쟁)에서 인민과의 동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확보하고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인물이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민주주의적’ 독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접근은, 루소로부터 그람시를 거쳐 루이 알튀세르에게서 적극적으로 발전된 바 있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중심 문제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시작에 관한 질문이며, 그 질문이 “인민의 관점에서 군주에 의해 대답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초반, ‘미실’(고현정)은 현실 정치가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미실’의 입을 통해 통치론에 관한 주옥같은 대사들이 터져 나올 때, 복잡한 현실에 정치력으로 개입하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의 매혹이 느껴지기도 한다. ‘미실’이 ‘환상의 정치’를 주장하며, ‘덕만’의 ‘희망의 정치’에 대하여 “그 희망이란 것이, 그 꿈이란 것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공주께서는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 매혹은 전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실’은 마키아벨리적 의미의 군주가 될 수 없다. ‘미실’에게는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것이 목적일 뿐 ‘권력 이후’의 목표가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부도덕한 수단으로서 정치적 책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실’의 정치는 대중을 조작하는 ‘환상의 정치’에 그칠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하는 군주의 정치적 책략은 ‘불가능한 목적’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왕에 의해서 창건된 공화국’인 고대 로마와 같은 정치적 공동체를 이탈리아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창건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미실’에 반해 ‘덕만’은 그러한 꿈을 꾸는 정치가다. 그것이 ‘삼한일통’이라는 역사적 한계에 갇혀있을지라도, ‘덕만’은 대중(인민)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 희망을 꿈꾼다. 그러한 희망만이, ‘미실’에게서 냉혹한 현실 정치를 배워가는 ‘미실’의 정치적 제자인 ‘덕만’을 ‘미실’과는 다른 차원, 즉 군주의 자리에 놓는 차별성이다. 환상의 스크린에 걸리기 마련인 정치를 그래도 대중의 희망으로 함께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군주의 정치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를 참조하며, 오늘날의 ‘새로운 군주’는 대중의 의지를 결집하는 정당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 정치는 여전히 ‘미실’적 수준의 ‘환상의 정치’에 불과하다. ‘중도실용’이라는 환상의 정치에 발목이 잡힌 채,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답답함이 반사적으로 <선덕여왕>의 인기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글_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