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변의 변] <부러진 화살>은 다시 소통을 요구하는 ‘장외변론’
정서적 진실 – 당신이 피고인이라면
1.
<부러진 화살>은 법정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로 육박해 들어가는 반전도 없고, 법정에서 벌어지는 양측의 흥미진진한 논리적 공방도 없다. 영화가 공들여 보여주는 것은 항소심 법정에서의 피고인과 변호인의 항변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피고인측이 ‘극장’이라는 법정 바깥의 공간에서 행하는 ‘변론’이다. 그 항변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대사는 실제 공판기록과 거의 정확하게(“98%”) 일치한다. 그러나 검찰측 주장이나 1심법원의 판단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감독의 시선에 의해 편집된 사실이다. “씽크로율 98%” 또는 “예술적 허구”라는 팩트(fact)논란이 나오는 이유다.
영화적 이야기 구축의 형식이 이렇다 보니, 사건에 대한 형식적 균형이나 객관적 공정 따위의 포맷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1심에서 이루어진 각종 증거조사 결과는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항소심의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켰다는 법원의 유감 표시가 나올 법도 하다.
2.
감독은 왜 이러한 이야기 형식을 취했을까?
평론가 진중권은 “김(명호) 교수 개인의 돈키호테적 망상에, 박훈 변호사의 운동권적 서사가 결합하고, <도가니>의 흥행으로 확인된 사법부에 대한 대중적 불신에 편승하려는 감독의 욕망이 적절히 합쳐져 사실과는 다른, 180도로 다른 자칭 ‘법정 실화극’이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도 “흥행을 염두에 둔” 예술적 허구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을 고려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영화가 사실을 극화한 형식이라고 해서 달리 볼 것도 아니다. 더욱이 영화에서 흥행이 고려된 부분은 변호사의 캐릭터 구축이나 여기자와의 관계 설정, 교도소에서의 추행 사건 등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법정 영화의 문법을 벗어나서 피고인측의 주장을 건조하게 보여주는 것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 구축의 기본 방식에 극적이지(흥행적인) 않고 밋밋하다 보니, 부수적인 흥행 요소들이 들어왔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3.
나의 대답은 이렇다.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시선이 ‘판사 또는 배심원’이 아니라 ‘피고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당신이 판사 또는 배심원이라면 어떤 판단을 하겠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저 상황에 놓인 피고인이라면 어떻겠는가’에 있다. 즉 영화는 판단의 진위 여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정이라는 공간에 대한 ‘정서적 진실’을 탐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실체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형사법정이라는 공간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다. 피고인이 김명호 교수와 같이 다소 ‘괴짜’인 ‘돈키호테적’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법원은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법원뿐만이 아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피고인에게 죄를 묻는 검찰이나, 경찰도 재판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실을 별견해가는 당사자들이다.
그런데 ‘석궁사건’은 어땠는가? 직접 증거인 ‘부러진 화살’은 합리적 이유 없이 사라져버렸고, 증거수집의 절차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석궁을 잡았는지 여부에 대한 진술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석궁에 대한 지문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경찰은 발사실험을 한답시고 증거를 오염시켰고,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아래를 향해서는 석궁이 격발될 수 없다는 전문가 의견이 수사과정에서는 묵살되었다.
법원은 이런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고, 그만큼 신중해야 했다. “그래도 쏘지는 않았다”는 피고인의 주장에 비추어 “쏘았다”는 공소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제기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피해자가 자신들의 동료인 판사였다. 국민들이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더욱 신중해야 했고, 절차적으로 공정해야 했다.
그러나 어떠했는가? 피해자를 다시 증인으로 세워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화살이 관통한 웃의 부위를 서로 맞추어 보자는 변호인의 요청도 합리적 이유없이 거절되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측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법관이 변론을 들었더라도 그저 나른한 표정으로 “말해 보세요”라고 하며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판단은 내가 합니다”라는 권위적 태도도 그 목소리에 응대했다면, 그것은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개판이지 재판이야”라는 피고인의 격한 분노가 정서적 메아리를 갖는 지점이 여기다.
4.
석궁 사건 석 달 뒤에 신임 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한 말은 이 사건의 본질을 잘 설명한다.
“재판의 본질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법관과 소송관계인 간의 적절한 의사소통입니다. 법관은 법정에서 성의를 다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함은 물론, 당사자의 주장과 입증을 어떻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까지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당사자를 적극 설득하고, 재판 결과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며, 법관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법관 역시 소송관계인들과 원활한 소통을 통해 자신의 오류와 편견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재판의 본질로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의 본질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자신의 사명을 “목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통의 기본은 권력을 가진 자가, 권위를 가진 자가, 책임을 지닌 자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마도 정지영 감독이 판단한 사건의 핵심과 영화의 전략도 그랬을 것이다. ‘법정에서 피고인측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걸 영화로 들려주자. 그렇게 다시 소통이 시작될 수 있다. 법정에서는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극장에서 목소리를 주자.’ 이 영화가 그 본래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지점이 여기다. 논리적, 이성적 공간이어야 할 법정에서도 당사자가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공간은 어떻겠는가?
정지영 감독의 설명을 이렇다. “이 영화는 사법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와 일반 국민의 관계를 들여다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사법부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5.
“이는 결과적으로 사법테러를 미화하고, 근거 없는 사법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논평을 내고, 국민과의 대화를 한다는 법원은 아직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소통은 대화 당사자의 경험세계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한다. 전관예우가 없다거나 전관에 의한 ‘장외변론’이 없다는 법원의 주장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반응하는 정서적 진실을 모른다. 전관에 의한 ‘장외변론’이 있다면, 이 영화는 감독에 의한 극장에서의 ‘장외변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 의한 장외변론은 결과에 부당하게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소통을 통해 다시 관계를 구축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실체적 진실 – 당신이 판사라면, 배심원이라면
1.
평론가 진중권은 “개그는 개그로 듣고 영화는 영화로 보”라고 주문하며, “석궁 사건은 사법부 비판이라는 메시지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소재다. 재판의 ‘절차’를 문제 삼으며 재판의 ‘실체’를 흐리려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정치적 쇼맨십에 재판부가 잔뜩 짜증이 난 상태에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평소 진중권의 빼어난 논리와 균형감각을 좋아하지만, 이번 비판에 대해서는 많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개그에서 팩트를 발견하고, 허상 같은 현실에서 진실을 건져 올리던 평소 그의 비평적 태도와도 어긋난다. 더욱이 이런 주장은 영화가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축소하는 태도이고, 법원에 의하여 확정된 사실만을 팩트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부당하다.
2.
실체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형사재판에 의하여 확정되는 사실도 절대적일 수 없다. 언제나 항상 오류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 주어진 증거에 의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재판의 본질이다. 더욱이 ‘절차’적 공정이 흔들린다면, ‘실제’적 진실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3.
관객은 이 영화 또는 영화에 의하여 극화된 ‘석궁사건’을 판사 또는 배심원의 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화가 검사의 주장이나 법원의 판단을 보여주지 않으니, 관련 자료를 읽어보는 수고가 필요하다.
나는 직업적 관심과 영화에 의하여 던져진 열린 결론의 질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공판기록과 판결문을 읽어 보았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특히 형사재판이 요구하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에 의하여 석궁을 쏘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가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몇 가지만을 언급한다.
4.
첫째,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의 석궁 발사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대립된다. 초보자가 불완전 장전을 하게 되면, “사과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에,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두 계단위에서 쐈다고 한다면 화살이 흘러내려” 발사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를 검증을 통해 확인하거나, 피해자를 증인으로 불러 다시 확인했어야 한다. 더욱이 피해자의 증언은 화살을 맞은 정황에 대해서 진술이 일관되어 있지도 않았다.
둘째, 피해자의 상처 부위는 아랫배 부분이고, 나머지 옷들은 모두 이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유독 양복의 구명 위치만 가슴 부분에 나있다. 이런 정황은 몸싸움 과정에서 화살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었을 것이라는 피고인측 주장에 더욱 부합한다. 몸싸움 과정에서 겉옷인 양복 상의가 끌려 내려온 상태에서 화살에 맞았거나 찔렸을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한 것이다.
5.
이러한 두 가지 가정은 모두 공판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피고인 측에서 자해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재판의 논점이 흐려진 측면은 있다고 본다. 직접 공판기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판단하는 것이지만, 내가 사건의 변호인이었다면 우발적 발사 가능성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소송 전술의 당부를 떠나, 판사인 피해자가 거짓 진술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경험적 전제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피고인측에서 주장하는 정황에 대한 의혹도 불합리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 심리했어야 했고, 더 적극적으로 규명했어야 했다.
상해의 고의로 상해의 결과가 발생했으면, 양형에서는 비슷한 것이 아니냐는 양형감각이 아니라, “그래도 쏘지는 않았다”는 피고인의 목소리를 듣고 합리적 대답을 주었어야 했다. 그게 국민들이 원하는 재판이고, 재판의 본질이다.
글_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