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광화문 외출- 김정하/시설공대위
쉼표하나
그녀의 광화문 외출
김정하 – 시설공대위
얼마 전에 전화가 왔다. “정하씨, 나 이사했어요. 센터언니들이 도배랑 장판도 새로 다 해줬구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반가운 전화한통. 시설공대위를 결성해서 처음으로 시설을 폐쇄시킨 경기도 S시설에서 생활하던 최씨의 전화이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녀와 뜨끈한 방바닥을 뒹굴며 밤새 수다를 떨어보자고 약속했다.
경기도의 S시설을 찾아간 것이 벌써 2003년의 일이다. S시설에서 탈출한 김씨로부터 시설내 폭행, 감금, 강제노동과 강제투약 등의 인권침해들을 제보 받고 몇몇 단체의 인권활동가들이 나섰다. 우리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오빠가 알콜중독자입네, 시설에 입소시켜려고 하네’ 등의 거짓말을 해가며 사전 탐문을 나갔었다. 애써 어리숙한 표정과 말투로 시설을 둘러보며 오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막 나가려고 하는데 원장의 사위인 어떤 남자는 나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 “당신 기자지?”
사실 법적으로 미신고시설에 대한 조사권한도 없는 우리가 인권침해를 참을 수 없다는 의협심으로 S시설에 들어간 것이 결국 그녀를 미신고시설, 사실상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 셈이다. 시설을 폐쇄시키기 위해 우리가 몇 차례 시설을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마당한쪽에서 우리를 지켜봤다. 그녀는 시설이 폐쇄되면서 그렇게도 염원했던 자유를 찾았고, 이제 그녀는 진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시설에서 나온 그녀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식당일 아르바이트는 한 달에 한번 정신병원에 간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두 번이나 짤리게 되었다. S시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20대 시절을 모두 보내야 했던 그녀는, 사회에 나와 보니 모든 것이 너무 변했다고 했다. “정하씨, 내가 제일 놀란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렇게나 작은 핸드폰을 하나씩 들고 다닌다는 거예요. 제 친구들도 이제는 다 아이엄마가 됐더라구요. 근데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해도 컴퓨터를 못하니, 식당일 밖에 할 수 없어요.”
그녀는 S시설과 그전에 있던 기도원생활을 포함하면 약 13여 년을 시설에 감금되어 살았다. 한창 젊은 시절을 꽃피울 그녀의 이십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병을 치유한다는 기도원(후에 정신요양원의 간판으로 미신고시설을 운영했다)’에 바친 셈이다. 그녀는 나오고 싶었지만 나올 수가 없었다. 면회를 온 아버지는 그녀의 증세가 심하니 그냥 돌아가라는 원장의 이야기만 믿고 돌아갔고,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려 면회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나갈 수가 없던 S시설 운영자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여 가며 시설을 유지해갔다.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마치지 못한 고등학교도 다시 다니고 싶어 했다. 연기자가 꿈인 그녀는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또 자활사업으로 하고 있는 ‘도배’사업도 그녀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않고 재밌다며 배웠다. 그 동안 고시원을 오갔던 그녀는 이제 자기가 번 돈으로 방을 구했고, 함께 도배를 배웠던 언니들이 공짜로 도배며 장판까지 해줬다고 한다. 그 집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그녀는 시설에서 나온 지 6개월이 되어서야 내게 처음 연락을 했었다. 초봄에 우리는 경복궁을 가고, 인사동을 구경하고, 나중에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켠 벤치에서 캔맥주를 마셨다. 늘어진 봄볕에서 그녀는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광화문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것이 꿈만 같아요. 이제 정말 자유를 찾은 것 같아요.” 행복해하는 그녀와 함께 걸으며, ‘자유’의 소중함이 새삼 다가왔다. 광화문을 걸으면서 그날처럼 행복한 날은 없었다. 그녀는 자유를 얻었고 나는 활동의 용기를 얻었다. 우린 친구가 되었고, 이제 서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녀라면 지나간 20대가 너무 억울해서 그들과 사회에 대한 증오로 가슴을 태울 만도 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애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시설공대위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삶을 살아온 시설 생활인들을 만났다.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이곳에 왔는지 알아보면 복지시설은 우리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외면한 이들이 ‘인생의 막판에 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지’를 효율적으로 제공하겠다는 명분으로 수용을 강요하고, 사회정화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강제로 가두기도 했던 상황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부산에서 APEC회의를 위해서 노숙인을 시설에 강제 수용한 것을 보면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나는 사회복지가 곧 인권운동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복지시설이 반인권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녀가 있던 S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은 다른 시설이라 하더라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삶을 만들어가고픈 이들에게 사회복지시설은 때론 ‘독’이기도 하다. 그녀의 13년은 아무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네가 정신병이 있으니 그곳에서 요양 받았을 뿐이라고 오히려 우리사회는 그녀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그녀와 또다른 그녀네들이 자유롭게 광화문을 활개칠 그날을 기대한다. 그날이 오면, 내가 할 일이 없어지리라. 아! 기쁨의 그날!
※’시설공대위’는 <조건부신고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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