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년, 목욕가다_ 김비
공감포커스
몇 년 전 음력 설 때였던 것 같다.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 정도면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일이지만, 노는 날이 나흘, 혹은 그 이상 엮여 나란히 붙어 있으면, 나는 버릇처럼 제주도에 다녀올 생각들을 떠올린다. 보통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나풀나풀 놀러나 다녀오는 것들을 떠올리느라, ‘나 이번에 제주 간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번 ‘좋겠다’를 연발한다. 그렇다고 제주에 가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확 트인 바다며, 산이며, 그 커다란 섬에 발을 디디면, 오장육부에 쌓였던 숙변까지 내려갈 시원함은 내게도 반가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름 나절에는 휴가가 길어 배를 이용해 차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산으로 바다로 신선놀음을 하지만, “겨울에는 차를 끌고 다니지 마라”, 손을 훼훼 젓는 엄마의 만류에 나는 주로 비행기를 이용해 제주에 간다. 그 때에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간 터라, 연휴 내내 방바닥을 뒹굴며 위풍 센 방구석에서 배를 지지고 있었다. 데굴데굴 넓지도 않은 방 안을 굴러다니는 날 보고, 엄마는 해수탕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실 나는 아무도 봐주지 않은 소설 나부랭이를 쓰느라고 뒷목이 뻣뻣해져 있던 차였으니, 뜨끈한 몸에 몸을 담그는 일은 간절히 내가 원하던 것 중에 한 가지였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수술을 하고 나서도 거의 다섯 해가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여탕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내 손을 잡고 가자고 끌어당기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괜히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TV에서 본 내 얼굴을 기억하는 처자들이 있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래만 수술을 했을 뿐, 윗몸은 영락없는 사내놈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웬만큼 눈치가 빠른 여편네는 단박에 내 태생을 알아챌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저 치는 남자의 태생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니 저런 사람과 벌거숭이로 마주하는 일만큼은 때려죽여도 못하겠다, 빼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간다면, 탕 속에 들어앉은 그 벌거숭이 여자들 중에 남자의 성기를 달고 태어난 내 앞에 자신의 벗은 터럭을 보일 처자가 몇이나 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해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웬만하면 “싫다”는 이야기에 채근하는 일 같은 것은 별로 없던 노인네가 그날따라 참 끈질겼다. 평소에 엄마와 동행을 해서 해수탕까지 마실을 다니시던 새 아버지도 그날따라 발을 다쳐 엄마와 동행을 할 수 없던 터라, 나는 목욕탕 옆 찜질방에 가 앉아 있겠다는 단서를 달아 엄마의 동행으로 따라 나섰다. 그러나 목욕탕에 도착해보니, 그 놈의 시골 해수탕이라는 것은 찜질방이 따로 달려 있어도 옷을 갈아입는 것은 여탕 탈의실 안에서 해야 하는 터라 나는 꼼짝없이 여탕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커다란 키에, 계집년보다는 사내놈에 가까운 내 몸뚱이를 보고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옷까지 벗고 나니, 엄마는 그깟 하나마나한 찜질보다는 해숫물에 몸을 담그는 게 낫지 않겠다고 옆구리를 찔렀다. 그렇게 얼레벌레 엄마를 따라 탕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괜히 이 년의 태생이 들통 나 엄마와 한 무더기로 봉변을 당하게 될까, 구석에서 물을 찌그리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앉은뱅이 의자를 주섬주섬 들고서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등을 벅벅 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라서 어찌 쓰냐, 밥 좀 처먹고 다녀라,’ 타박을 하며, 엄마는 한참을 그렇게 내 꼬챙이 같은 등에 얼굴을 박고 땀을 흘리시다가, 남이 들을까 내 귀에 팅팅 불은 얼굴을 들이대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괜찮다, 이 정도면 그냥 목욕탕 다녀도 괜찮겄다, 그 동안 목간도 못 다니고 힘들었지? 그냥 편안하게 다녀도 되겄어.’ 하며 투덕투덕 내 등을 두드렸다.
뜨거운 해숫물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눈가가 뜨거워졌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뜨거워져 나는 한참이나 샤워 물줄기 속에 그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엄마, 트랜스젠더니, 성 정체성이니, 그런 것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 같아 처음부터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내 얄팍한 머릿속보다 더 깊게 내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하루하루를 헤아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것은 내 평생 처음 느껴본 등줄기가 저릿저릿해지는 그런 위로였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판결문이 떨어졌다. 그러나 TV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도 엄마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반쪽짜리 당신 딸년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지 잘 모르실 것이 뻔하다. 이번 여름에 제주에 가서 그 판결이라는 것이 당신 자식 앞으로 살아가는데 숨통 트이는 일이었더라, 이야기하면 그제야 잘 되었네, 잘 되었네, 함뿍 웃어주시리라.
그렇게 모자란 어미를 대신하여 그 동안 애써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이제 겨우 한 걸음 뿐이지만, 그것은 내 어미가 하는 못난 자식 걱정을 덜어드리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내 모자라고 서러운 살음이 조금은 더 당당해지는 일이었음을 쑥스럽게 웃으며 말씀 드린다.
난데없는 수마가 온 나라 국민의 마음에 아픔을 새긴 지금, 나와 내 어미의 가슴에 희망이 싹텄듯이 이 세상 모든 희망을 갈구하는 분들의 삶에도 희망의 빛이 비추시기를. 절대 쓰러지지 않는 부활의 날들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