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헌법은 바뀌어도 행정법은 변하지 않는다.” 독일 행정법학의 아버지격인 오토 마이어의 ?독일행정법? 제3판(1924년)의 서문에 나오는 이 도도한 명제는 정치에 대한 독일 관료주의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자, 1918년 독일혁명의 결과를 일거에 거부해버린 관방법학의 오만함을 드러낸다.
지주 귀족인 융커와 왕실을 둘러싼 군부와 관료들이 지배하던 독일 제정(帝政)은 제1차대전에서의 처절한 패배에 이어 하급병사들이 중심이 된 독일민중들의 평화와 빵과 자유를 위한 처절한 항쟁에 그 권좌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헌법의 모태가 되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제정체제의 헌법이 공화국의 헌법으로 바뀌고, 나라의 주인 또한 황제에서 민중들로 바뀌었다.
하지만, 저 법률학자는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을 조롱하고 나선다 : ‘너희들이 아무리 헌법을 바꾸고 나라의 주인인양 외쳐대어도, 국가의 운영체제와 통치의 틀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국가는 지배엘리트의 것이고 법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그래서 헌법은 바뀌어도 너희들의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헌법은 바이마르라는 체제가 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도 이 법률관료들은 국민주권이 아니라 국가주권이니 법주권이니 하는 이상한 논리로 세상을 우롱하였다. 제정체제는 무너져도 그 통치권력의 요체는 여전히 관료들과 소수의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남아 있음을 거듭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을 지나 개헌의 논의가 한창인 바로 이 땅에서 저 오토 마이어의 저주는 정확히 되살아난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은 헌법을 바꾸자는 국민적 요구로 이어지고 있지만, 행정법은 여전히 요지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헌법을 개정하자는 논의는 무성하되 행정법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혹은 행정의 구조와 과정은 어떻게 바뀌고 또 제도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다. 오히려 주요 임명직과 선출직 공무원의 자리에 남녀동수의 원칙을 적용하자는 제안에 그런 헌법규정은 집행이 곤란하다는 행정법적 논리가 딴죽을 걸고 나선다.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추자는 제안은, 입시에 매진해야 할 고등학교가 정치판이 되어 혼란해진다는 규제와 통제의 논리가 가로막는다. 살만한 나라를 만들어내기 위한 헌법적 창의력이 무성하여야 할 이 시기에 틀에 박힌 관료적 사고가 헌법을 지배해 버린다. 헌법은 바뀌어도 행정법은 바뀌지 않고 또 바꿀 의향도 없다. 그러니 헌법을 함부로 건들지 말라….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헌법을 바꾸면 그 하위법률은 의당 바뀌어야 한다. 헌법은 스스로 집행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헌법의 개정작업은 헌법만의 개정이 아니라 그것의 집행을 위한 법체계 전반에 걸친 개정까지도 포함하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헌법개정국면은 정확하게 이 부분을 가려버린다. 가장 적극적으로 개헌국면을 이끌고 있는 대통령의 개헌안을 보자. 대통령은 “내 삶을 바꾸는 개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헌법을 위해 국민들이 나서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 “국민헌법”이 만들어지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뀌며 내 삶을 바꾸는 국가행정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지에 대한 언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대통령의 개헌안은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한다(개헌안 제35조제4항)고 내세운다. 그러나 세입자들이 2년마다 겪어야 하는 집세인상의 고통은 이 조항만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세입자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현행 「주거기본법」은 이 헌법조항으로 인해 어떻게 바뀌게 되고 그래서 수많은 세입자들과 주거취약계층들이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지의 설명이자 약속이다. “안전하게 살 권리”(제37조제1항),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제38조제1항) 등등의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법이 어떻게 바뀌길래 “내 삶”이 어떻게 바뀌게 된다는 희미한 비전이라도 동시에 나와 있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헌법 하나 바꾼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헌법이 바뀔 뿐이다. 그 점에서는 헌법은 정치의 산물이다. 하지만 헌법이 바뀌면 그에 따라 반드시 바뀌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행정법이다. 현대사회에서의 헌법은 행정법을 경유해서야 비로소 그 위력을 발한다. 그것이 있어야 헌법이 구상하는 국가조직이 완비가 되고 그것이 있어야 모든 이들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며, 그것이 있어야 내 삶이 바뀌어 나가게끔 하는 재정이 확보된다. 그래서 지금의 개헌국면에서 중요한 것은 헌법개정안에서의 주거권규정이자 동시에 「주거기본법」이나 「주택임대차보호법」과 같은 하위법률들의 개정안–혹은 그것을 개정하기 위한 기본계획–이다.
1980년대 말 이래 사회변화의 수단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국면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때,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그 절차에 참여하였다. 그들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라는 인식과 함께, 자신들의 삶 하나하나를 바꾸려면 어떤 법규율이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신설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이런 요구들을 헌법이라는 최고규범의 틀속에 담아내기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들은 헌법을 넘어 자신들의 일상에 작동하는 모든 법규율들을 총체적으로 바꾸어 나가고자 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헌법은 구체적이고 지시적이고 강령적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도 담아낼 뿐 아니라 국가에게 가장 구체적인 사항까지도 지시하고 의무지우며, 향후 그 완전한 또는 최대한의 실현을 위한 정책과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할 것은 요구한 것이다.
헌법은 시민들의 일상에 작동하는 모든 법령들의 총체이다. 그러기에 헌법의 개정은 문자 그대로 나라를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헌법개정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헌법을 바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내기를 원한다. 실제 바꾸어야 하는 것은 헌법이라기보다는 전세값 안정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거기본법」이고, 있으나마나 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이다. 최근 문제로 되고 있는 토지공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토지공개념을 선언하는 헌법조항이 아니라,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토지투기를 막고 그 불로소득을 환수하며 주거취약계층에 안정된 거처를 제공하는 ‘법률’이다. 혹은 공직에서의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국가공무원법」이거나 「공직선거법」의 개정이다.
그럼에도 헌법개정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법률들이 현실에서 도저히 만들어지지 않으니 헌법을 바꾸어서라도 그 입법을 강제해 보고자 하는 답답함 때문이다. 최근 헌법개정논의에서 국민발안이나 국민소환과 같은 직접민주제의 장치들이 거론되는 것 또한 이런 답답함에서 연유한다. 그들에게 맡겨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으니 우리가 나서서 우리의 문제를 직접 풀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은 저 오토 마이어의 도발처럼 단순한 슬로건에 멈추어 서서는 안 된다. 혹은 그의 말처럼 ‘헌법 따로, 행정법 따로’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헌법은 정치의 노리개가 아니며, 헌법개정의 작업이 촛불시민들의 성난 목소리를 교묘하게 우회하는 통치술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시민들이 자신의 일상을 걸고 세상을 바꾸는 가장 극단적인 국면의 정치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6·13 지방선거와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자는 지난 대선 당시의 국민적 합의는 자유한국당의 몽니에 실현불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헌법개정의 작업은 국민투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는 장대한 기획으로 이루어진다. 헌법개정의 작업은 국민투표의 실시여부와 관계없이 앞으로도 중단 없이 지속되어야 하며 또 그리 될 것이다. 정녕 바뀌어야 하는 것은 행정법이고, 행정권력이며 그것을 통제하는 정치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번의 헌법개정약속의 무산은 되려 우리에게는 기회로 다가 올 수도 있다. 시간 때문에 혹은 이런저런 행정상의 장애 때문에 헌법개정의 작업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던 우리 시민들이 새삼스레 헌법을 이야기하고 헌법을 숙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점해 왔던 헌법개정의 국면들을 우리가 점령하고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시공간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글_한상희(공감 이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