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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인권# 취약 노동

꼭 하고 싶었던 소송

꼭 하고 싶었던 소송이 있다. 의뢰인은 20대 후반의 여성 두 명이었다. 괴롭힘 제보 이메일을 통해 의뢰인들을 만났다. 처음 이메일을 읽었을 때가 기억이 난다. 회사에서 의뢰인들이 당한 성희롱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가 얼토당토아니한 결말에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소송을 해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판에 의뢰인들은 소송을 포기했다. 분노와 아쉬움을 담아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소현, 김수진(가명) 씨는 작년 10월 한 중소기업에서 처음 만났다. 열다섯 명 남짓의 40대 이상 남자들로만 구성된 회사였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알바 소개 사이트에서 사무보조를 뽑는다는 채용 공고를 봤고 면접을 본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하고 나서 이소현, 김수진 씨가 처음 들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룸싸롱 여자를 뽑으려고 했다 실제로 룸싸롱 여자에게 계약직 자리를 권유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싫다 하더라. 그래서 너희 둘을 뽑았다. 너희 둘은 능력은 없지 않느냐. 얼굴만 보고 뽑은 것이고 사실 여자 둘을 사무실에 앉힐 이유도 없지만 남자들만 있으니 칙칙했다. 그래서 뽑은 거다.’

남자 직원들은 이소현, 김수진 씨를 “애기야”, “아가야”라고 불렀다. “소현이는 치마가 더 잘 어울리네.”, “수진이는 오늘 예뻐 보이네.”, “소현이는 얼굴은 갸름한데 팔뚝에는 생각보다 살집이 있네.”, “여자는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야 해. 안 그러면 뱃살 나와.”, “나한테 쪽지 보낼 때 하트도 보내줘”라며 수시로 외모 평가를 하는 남자 직원이 있는가 하면,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성기 제모를 받으며 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라고 떠드는 남자 직원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맞장구치면서 웃고 떠드는 남자 직원도 있었다. 성매매업소에서 드나들면서 애인이 다섯 명이라고 자랑하는 남자 직원이 있는가 하면, 퇴사한 여직원들의 몸매를 회상하고 품평하는 남자 직원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이소현, 김수진 씨는 술을 따르도록 강요 당했고, 이소현 씨는 술자리에서 상사로부터 허벅지를 주무르는 성추행도 당해야 했다.

이소현, 김수진 씨는 성희롱을 당할 때마다 서로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며 겨우 참아냈지만(서로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증거로 남길 수 있었다.) 출근하는 매일이 너무나 괴롭고, 오늘은 또 어떤 수모를 당할까 두려웠다.

일을 시작한 지 2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서 이소현, 김수진 씨는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이 모든 상황을 폭로했다. 대표는 알겠다고 했고, 직원들에게 경고 조치하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다. 남자 직원들은 이소현, 김수진 씨를 더 많이 괴롭혔다. 그간 지급하던 자기계발비를 이소현, 김수진 씨에게는 지급하지 않았고 하는 업무마다 시비를 걸었다. 급기야는 항의하는 이소현, 김수진 씨에게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소현, 김수진 씨는 짐도 못 챙긴 채 쫓겨났다. 다음 날 출근을 했지만 지문 인식 출입 장치에서 그녀들의 지문은 이미 삭제된 상태였다.

성희롱, 보복조치, 부당해고까지…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이소현, 김수진 씨를 면접하고 뽑았던, 입사 때부터 쫓겨 날 때까지 이소현, 김수진 씨가 일했던, 그녀들에게 당장 짐 싸서 나가라며 쫓아냈던 바로 그 회사가 근로계약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소현, 김수진 씨의 사용자는 따로 있다. 바로 파견업체다. 이소현, 김수진 씨가 쫓겨나자 파견업체는 곧바로 근로계약을 해지했다.

나와 만나기 전 이소현, 김수진 씨는 직장내 성희롱으로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었고, 이소현 씨는 성추행으로 경찰에 고소한 터였다. 그러나 정작 이소현, 김수진 씨를 쫓아낸 회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파견법은 해고에 관해서는 파견업체만이 사용자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쫓아낸 회사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근로계약서만 쓴 파견업체가 해고의 책임자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도 불분명하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성희롱 예방교육에 관해서는 사용사업주가 사용자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성희롱 발생 시 조치의무나 불이익 금지 의무에 관해서는 누가 사용자인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공항에서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직원들은 대부분 파견업체 소속이다. 항공사의 제복을 입고 있지만, 티켓팅을 하거나 라운지에서 근무하는 직원의 사용자는 백이면 백 파견업체다. 코로나19로 비행기가 멈췄을 때 가장 먼저 쫓겨난 사람이 바로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다. 항공사는 파견업체와 맺은 계약을 해지했고, 파견업체는 계약 해지를 이유로 직원들을 내쫓았다. 파견계약이 해지되면 근로계약도 자동 종료된다는 내용이 근로계약서에 적혀 있기 때문에 쫓겨난 파견 노동자는 부당해고를 다투기도 어렵다. 자동 종료 규정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있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표적인 노동정책, 즉 고용유지지원금도 파견노동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고용유지지원금은 고용에 변동이 없는 기업에 지급되는데, 파견업체는 사람의 드나듦이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강제로 휴직을 당하면서도 휴업수당을 못 받는 일이 파견노동자가 부지기수였다.

아시아나항공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위기의 시작부터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권고사직으로, 월급 한 푼 없는 무기한 무급휴직으로 내몰렸다. 이를 거부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되었다. 아시아나 하청회사들은 정부가 내놓은 고용유지지원금조차 신청하지 않았고, 원청인 아시아나항공은 나 몰라라 한다. 법의 비호 아래 파견과 용역이 난무한 상황에서, 노무를 제공 받아 혜택을 보는 자들이 사용자가 아니라 고객으로 둔갑하였다.

이제 진짜 결론을 말하려 한다. 근로감독관은 이소현, 김수진 씨의 직장 내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쫓아낸 회사에는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성추행도 불기소 처리되었다. 이소현, 김수진 씨는 법이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거듭되는 고통에 질려버렸다. 쫓아낸 회사와 파견업체, 가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하자고 설득했지만 이소현, 김수진 씨는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다. 설득하지 못한 아쉬움, 그녀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위로를 푸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윤지영

# 취약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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