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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활동담] 청소년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 – 최성용(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단체활동담]    청소년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는 최성용이라고 합니다. 올해 20대가 되었고, 학교를 졸업했답니다. 나름대로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제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ς

 학교라는 공간에서 무려 12년을 보낸 만큼, 제 유년의 많은 페이지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학교에서의, 또는 학교와 관련된-이를테면 학원- 일상들인데요.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벗어난 지금에 와서 이전의 학교생활들을 상기시켜보면, 과연 내가 ‘자해나 자살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고 살아있다’라는 것에 대해 경이가 느껴지곤 합니다. 또한 학교란 곳만이 아닌 가정 역시, 편안한 곳이라기보다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고, 가정 내 관계에서도 많은 상처를 받았답니다.
 제 이야기를 읽으시는 분들은 ‘에이, 뻥은 무슨.’하고 받아들이실 것 같습니다만, 사실이랍니다. 참 많이 괴로웠고, 매우 버거운 상처들을 짊어진 채로 지금도 허우적대고 있지요.

 제가 아수나로에 들게 된 것은 2년 전 웹 검색을 통해서였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소리 없이 죽어가는 저에게 아수나로는 어떠한 ‘도피처’였습니다. 저는 비판적 의식이 남들보다 강했고, 많은 것에 매우 예민했었습니다.  그런 제가 ‘인권’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고, 뭔가 ‘말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여러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내서 나중엔 학교에 저항을 하기도 했는데요. 집단적인 저항이 아닌 개인의 저항이었기에, 그 ‘싹을 밟아버리려는’ 학교의 행동에 학교내부에서 고립을 당했었고, 그래서 많이 괴로워했었습니다. 또한 당시 가정 내에서도 ‘운동’을 하려는 것에 관한 탄압-넌 이제 고3이다, 라는 이유로-을 받으며 거의 1년간의 활동을 그만두게 됩니다.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끔씩 듣는 말입니다. “당사자도 아닌데, 과연 청소년의 운동을 해도 되는 건가요ς” “민법상 24세까지 청소년이랍니다.”라고 웃으면서 대답하곤 합니다만, ‘고졸=성인’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볼 때, 분명 ‘당사자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수능시험을 치고 나서 다시 복귀(ς)한 제가 당면하게 된 고민들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비당사자라는 것을 가른다면, 그 운동은 극명하게 한계성을 띠게 됩니다. 남성도 페미니즘을 외칠 수 있는 것이고,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 할 수 있으며,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함께 연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청소년의 운동에서 비청소년이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분명히 청소년으로써의 한계 역시 존재하기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대에 받았던 그 무수한 상처들이, 제가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집안 내에서의 폭력-물리적, 정신적 양 측면-과 학교, 사회 속에서의 폭력. 몰개성적이고 오로지 순종, 획일적 사고만을 강조하며,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고 철저하게 위계질서를 지키는 그 모습들. 그 기억들이 여전히 의식, 무의식 속에 남아 저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네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너 자신에게 국한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ς” 그 말을 듣고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러한 시야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나와 같은 내용의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아픔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과는 또 다른 위치에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예를 들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소수자로써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내용의 아픔이라고 해도 그 아픔의 이유는 동일합니다. 누가 더 약자, 소수자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유가 사회구조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인권운동을 한다고 하면 반말을 해댑니다. 그것도 운동가라는 사람들이!  학교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을 때 교사가 다가와서는, ‘학생이냐, 대학생이냐ς’는 이상한 질문을 해대기도 합니다. 그 대답에 따라 어투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뭐 사실은 대부분이 “야, 너 뭐야!”로 대화의 시작을 연답니다. 그리고 뉴스, 신문을 보면 어리다고 ‘~군, ~양, ~이’이라는 호칭을 따로 친절하게 사용해줍니다. 언어에서조차 청소년은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학교 앞 피켓시위, 선전전을 해보면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낯선 것에 위험을 느끼고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교사와 낯선 것에 흥미를 느끼고 다가오는 학생들. 교사들은 첫 대면부터 반말을 하며, 꺼지라는 식의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한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불붙듯 타오릅니다. 그리고 결국엔 학교에 대한 저항을 통해 인권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한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상상력이 가져다준 힘’이겠지요.

 절망은 겪은 사람은 그 절망이 자신만의 절망이 아니라 주위 모두의 절망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바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말이 의미를 잃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청소년은 분명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싹틔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그 이유는 두서없고 지루한 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드리는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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