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웅저의 이야기, 버마와 한국 그리고 나
[만나고 싶었습니다]
마웅저의 이야기, 버마와 한국 그리고 나
Prelude
버마 민주화 시위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숨지고 옥에 갇혔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이슈는 수명이 짧다. 한국 민중들은 점점 버마를 잊어가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버마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마웅저씨를 만났다. 내가 갖고 있는 많지 않은 지론 중에 하나는 ‘사람과 친해지려면 먹어라’다. 그래서 일부러 약속을 식사시간으로 잡았다. 얼큰이 칼국수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고 있는 마웅저 씨. 아시아 사람은 이런 것에서 서로 닮았나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내게 물었다.
“무슨 학교 다녀요?”
“음..oo대학교요.”
그가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안다. 오래 된 신문에서 그가 우리 학교 어학당을 다녔다는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동문이에요’ 어깨를 으쓱하며 나도 함께 웃었다. 한국어학당 두 학기 째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난민 신청이 거부됐다고 한다. “한국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때부터 안 다녔어요.”
8888항쟁 때 그는 수도 양곤에서 유학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선배를 잘 못 만난 탓에 민주화에 뛰어든 것일 수도 있겠다만, 내가 만난 그에겐 義憤이 있었다. 군부독재 정치가들의 여자문제, 돈 문제를 보면서 ‘지도자가 왜 저러나?’ 하는 분노가 쌓여갔다.
“2년 내다봤어요”
2년만 싸우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2년만 투쟁하면 이 세상이 평등하게, 평화롭게 변할 거라고 말이다. 그 후엔 정치 문제에 대해선 그만 두고, 그의 원래 꿈이었던 경제 분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가정에 아픔이 있었어요. 엄마아빠가 농민이었는데, 너무 가난했거든요. 아빠가 집을 떠나고, 엄마 혼자서 7남매를 키웠어요. 근데 형 누나들이 커서 엄마 말을 안 듣고 엄마를 잘 돌보지 않는 거예요. 엄마가 돈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 있으면 힘이 생기겠죠. 부자가 돼야겠다. 그렇게 부자가 돼서 엄마의 힘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엄마 같은 과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2년이 지나도 정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2년만 더, 2년만 더, 그렇게 2년씩 연장하다가 94년이 됐고,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이 거의 체포된 그 즈음, 버마에 함께 투쟁할 사람이 없어 결국 멀리 떨어진 한국을 택했다.
마웅저 씨는 94년에 한국에 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셈이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을 때, 한국에서의 삶이 이토록 길어지리라고 예상 했을까.
“한국도 2년 계획하고 왔어요.”
한국에 온지 벌써 14년 째, 많이 길어진 셈이다.
“한국 오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부자가 될 필요가 없어졌으니, 나라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찾은 대안
내가 배우는 것은 REAL이다.
한국 온 게 후회되지는 않았을까.
잠깐 동안은 그랬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가서 난민신청도 빨리 받아들여지고,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배우는 건 말 그대로 교과서에요. 난 한국에서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잖아요. 직접 활동가들을 만나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도 많구요.”
한국은 그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시민운동에 대해서 알게 됐다. 한국은 민주화가 완성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한국도 민주화가 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보안법, 이주노동자 문제, 인권 문제 등 산적한 문제가 많았다. 정치운동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시민사회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결국 시민운동과 인권운동을 배우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한국에 있는 거라고 한다. 그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적 대안을 ‘시민단체’에서 찾은 셈이다.
목숨을 걸지 않은 사람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민주화는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므로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버마에 돌아가도 위험하지 않도록 마음껏 참여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그래서 ‘버마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고, 공동 모금회를 만들어 부천 노동자의 집, 사랑의 열매와 함께 2억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젠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라며 농담 삼아 말한다.
태국에 있는 버마 난민촌, 이주촌에 수 많은 버마 아이들이 있지만, 필기구나 공책이 없어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게다가 버마 아이들의 30~40%는 초등학교 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기고 싶다
버마의 민주화에 대한 직접적인 요구는 접어든 걸까? 겉으로 보아서는 민주화 시위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마웅저씨의 대답은 ‘No’였다.
“시위는 계속되고 있어요, 거리에서, 그리고 절 또는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10명씩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어요. 특히 11월 3일부터 8일까지 UN특사가 방문했는데, 버마에서 민주화 시위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학생들과 스님들이 계속 가두시위를 했죠. 물론 많이는 못하지만…”
팜플렛을 돌리고 거리마다 벽에 글을 쓰고, 지하에서 시위조직이 계속 모였다. 포럼을 열고 세미나도 계속된다고 한다.
민주화 시위는 집 안에서도 계속 된다.
버마엔 국영방송 외에는 없다. 그래서 버마 민중들은 늘 군부독재 편에 서서 거짓을 말하는 방송에 대항하고 있다. ‘거짓말 같은 소식 듣지도 말자’라고 해서 라디오와 TV를 일정 시간을 정해두고 동시에 시청하지 않는 시위라고 한다.
절 내에서는 스님들이 군부독재와의 관계를 중단하는 시위를 계속 해 오고 있다. 버마가 불교국가는 아니지만 불교 인사들이 많은데다, 국가의 지원 없이는 스님들의 생활이 어려워서 불교와 군부의 관계가 꽤나 돈독한 편이었다고 한다. 버마 군부는 독재에 칼과 총을, 그리고 불교를 이용했다. 신문 1면에 항상 군부 정치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실렸고, 정치인들이 하고 싶은 말은 항상 큰 스님의 입을 빌려 하곤 했으니
시민들이 헷갈렸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체포 당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일부 스님들은 감옥 안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그리 군부독재가들이 더 이상 불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군부는 버마 민중을 통치할 힘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셈이다. 외신은 성공하지 않은 투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버마 민중들은 조금만 더 투쟁하면 이길 거라고 믿고 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나왔지만 그들은 몸이 아픈 만큼 마음은 튼튼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버마는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웅저씨의 말에서 힘이 묻어난다.
“8888때는 많은 운동가들이 체포 될까봐 걱정해서 도망 나왔잖아요. 저처럼요(웃음). 난 용기가 없어서 그랬지만, 요즘 투쟁가들은 질겨요. 사람들이 그래요. 이기고 싶다.”
“버마 군부에 비하면 박정희, 전두환은 착한 편”
한국과 버마는 닮은 점이 참 많다. 60년대 초반 친일 군인의 쿠데타부터 비슷한 시기의 민주화 항쟁까지… 버마의 군부독재가 더 질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마웅저씨의 생각이 궁금했다.
“박정희, 전두환은 버마 군부에 비하면 착한 편이에요.”
전라도 출신의 나를 앞에 두고 마웅저씨가 도발을 해온다.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내가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웅저 씨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과 버마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독재자들을 비교하면 너무 달라요. 박정희, 전두환은 학교 폐쇄를 할 때도 몇 개 안 했잖아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88년부터 90년까지 폐쇄했어요. 대학교는 9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열었구요. 그리고 한국 독재는 사람 말을 알아듣기는 하잖아요. 비록 깡패식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버마 군부독재는 사람 말을 못 알아먹어요.”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경제발전’에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한국 민중의 평가가 양분되는 이유는 서슬퍼런 군부독재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버마의 경우는 군부가 집권한 후 경제가 더더욱 악화됐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인해 버마 경제가 더 어려워 진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기업들 나가라! 대우 가스개발 멈춰라!”하는 요구들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은 모든 투자에 대해 반대하는 게 아니라 강제노동, 강제이주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더했다.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 텔레콤 업체에 독점을 허락한 다음 휴대전화 값으로 3백만원을 받고 그 차액을 군부가 챙기는 것이다.
학자에 대한 태도도 지독하기 짝이 없다. 정권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모조리 쫓아냈으며, 학계에 대해서는 로마자 표기법 하나하나까지 다 간섭한다고 한다.
버마가 속한 국제관계
마웅저씨는 또한 장기독재의 이유로 국제관계를 언급했다.
“한국 속에 미국이 있듯이 버마 속엔 중국이 있어요. 미국은 속마음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이미지는 좋게 하려 하잖아요. 인권에도 신경 쓰고… 하지만 중국은 인권을 무시하든 탄압하든 신경을 쓰지 않아요.”
미국은 버마의 민주화를 돕고 있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웅저씨는 미국이 진짜 관심이 있었다면 문제를 이토록 오래 끌었을 것 같지 않다고도 말했다.
버마엔 자원이 많다. 국제사회는 버마가 민주화되는 것보다 버마의 자원을 빼앗아 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그는 한국을 통해 타산지석 삼아야 할 게 많다고 말한다. 국제연대를 몰라서 한반도 분단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 마웅저 씨, 그는 버마는 한국처럼 원치 않는 분단을 겪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한국을 보면 배고프더라도 아무거나 먹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다급해도 외국에 의심 없이 기대선 안 된다는 말에 순간 입이 바짝 마른다.
버마는 다민족 국가라 ‘분단은 안 된다’는 자신의 의견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물론 소수민족이 독립을 원할 경우는 그 요구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다.
“다르게 살고 싶으면 다르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민주화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바란다
<한국 시민사회는 버마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은 한국 문제는 빨리빨리 해치우면서도, 버마 같은 외국에 대해서는 준비만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해 줄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은데도 계속 준비 중이래요.”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민주화의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가장 쉬운 것으로는 버마를 버마라(미얀마가 아니라) 부르는 것, 군부가 아웅산 수지와 대화하도록 요구해주는 것, 버마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향해서 말했다.
“군부와 관계를 맺는 건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겁니다. 가스개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주세요”
버마 민중은 한국을 어떤 시선으로 만나고 있을까.
지금 버마엔 한류열풍이 한창이라고 한다. 강제노동으로 시달린 하루 끝에 한류 드라마를 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건 드라마를 통해 볼 수 있는 한국식 자본주의 뿐이에요. 정작 전해줘야 할 건 민주화의 경험인데 말이죠.”
한국 기업의 가스개발로 강제노동, 강제이주 문제는 물론 환경문제도 더 심각해졌다.
“과거 한국은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가해자입니다.”
Coda
그를 처음 만났을 땐 하늘이 맑았는데, 인터뷰가 끝나고 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뿌연 하늘에 감정이입을 한다. 가해자가 된 사람의 송구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버마를 위해 뭐라도 당장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마웅저 씨의 쓴 소리로 인해 긁힌 심장이 아물 것 같다.
취재/ 글/ 사진_ 곽경란 공감6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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