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습니다-김조광수 대표
대책없는 낙관주의자 김조광수, 그에게서 따뜻한 성찰을 엿본다
대한민국에서 2007년을 지낸 사람들에게 김조광수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영화 D-war 를 떠올리곤 한다.작년 8월 100분 토론에 나와 D-war를 비판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그였다. 악플테러의 상흔이 깊을 법도 한데, 블로그를 통해 엿본 그는 여전히 활기차고 여러 일들에 바쁜 모습이었다.
대학로에 있는 청년 필름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두 명의 기자를 손수 대접하느라 잠시 분주했던 그는 이내 자리에 앉았다. 갈색 안경테 속의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지적인 느낌이다. 근황을 물었다. ‘인권’이라는 공감의 테마를 의식해서였을까. 그는 영화보다 게이인권운동 얘기를 먼저 꺼냈다.
친구사이(게이인권운동단체)에서 진행하는 커밍아웃 프로젝트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커밍아웃을 대중화 하는 일이라며 책상에서 ‘커밍아웃 가이드’를 건넨다.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실수하지 않고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커밍아웃은 동성애자 자신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힘든 일이고, 이성애자에게는 남의 일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런 인식을 전환하는 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할 때 친구에게 하는 것보다 가족에게 하는 것이 더 힘들다. “니가 그런 애였니?” 에서부터 “그래도 결혼은 해라”라는 반응까지 첩첩산중이다. 외국에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가족들의 모임이 활성화 돼 있다고 한다. “아 내 아들이 게이라니..”라는 생각에 힘들어 할 때, 이런 고민을 먼저 겪었던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조언해 줄 수 있도록 하는 모임이 활발한데, 커밍아웃 프로젝트는 한국에도 이런 모임이 가능해지도록 토양을 만드는 거라고 한다.
게이인권운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느냐고 묻자 사생활이 선정적으로 노출되고, 게이에 대한 편견 때문에 받는 오해도 많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한다. 학생운동 할 때는 마음은 열심인데 몸이 안 따라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친구사이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간다고……
커밍아웃에 집중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커밍아웃을 하고 나면 자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자부심을 갖게 되요. 대인관계를 맺을 때도 숨기는 게 없으니까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구요.”
또 커밍아웃 하지 않고 살면서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호모포비아적 발언들 혹은 이성애적 발언들 때문에 내면에 호모포비아 의식을 키울 수도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을 처음부터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힘든 싸움을 거치죠. 커밍아웃은 벽장 속에서 나오는 것(coming out of closet)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벽장 속에 오랫동안 살다가 한번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 빛을 본 사람은 다시 벽장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커밍아웃은 그런 겁니다.”
김조광수 씨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93년에 처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한다. 그가 83학번이니까 학생운동을 10년 했다는 그의 전과(?)로 봐서 대학생활 10년 내내 숨겨왔다는 얘기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학생운동을 탄압하면서 운동권에 대한 별의별 소문들을 다 퍼뜨렸다고 한다. 전대협은 ‘호모의 소굴이다. 그들은 혼음을 하고 집단성교를 한다.’ 이런 식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커밍아웃을 하면 집단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대협에 누를 끼치기보다 숨기는 게 좋겠다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진짜 바꿔보려고 했어요. 근데 그게 안되더라구요. 정치적 신념을 걸고 바꿔보려고 한 건데도 안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이걸 숨기려고 하는 걸까… 그 즈음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한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는데 친구가 편안하게 받아줬어요. 그것을 계기로 저를 긍정하게 됐죠.”
비성소수자의 접근이 상처가 될 때, 멋모르고 호기심만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상처받을 때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먼저 게이에 대한 환상을 말했다. ‘그들은 잘생기고, 패셔너블하고, Sex and the city 에서처럼 전문직일 것이다’라는 환상. 사실 게이는 다층적이고 외국인 노동자 중에도 게이는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이의 전형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난감하다고.
혹은 “넌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라고 물을 때, 게이가 ‘되는’것도 아닌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법하다.
또 성생활에만 관심을 가질 때, “나는 너의 성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왜 너는 나에 대해서는 Sex에 대한 상상만 하는지 묻고 싶기도 하죠.”
비성소수자로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이건 기자가 기회가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대학 문화인류학 수업 때였다. 성소수자 프로젝트를 하는 중에 ‘되어보기’가 있었다. 주위에 가까운 사람 한 명을 정해서 동성애자라고 가짜커밍아웃을 해 봄으로써 동성애자가 느끼는 호모포비아적인 반응을 직접 겪어 보자는 꽤 당돌한 취지의 과제였다. 잘 걸어 나가던 프로젝트를 주춤하게 한 것은, ‘되어보기’ 체험의 내용을 전해들은 한 성소수자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폭력적인 걸 왜 해?”
폭력적이라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 고통 혹은 분노를 나도 같이 느껴보겠다고 나선 내게, 이렇게 필사적인 내게 폭력적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느꼈던 것은 당혹스러움이기보다 차라리 피곤함이었다. 이것도 폭력이요, 저것도 폭력이요. 세상만사를 모두 폭력으로 느끼는 그녀였다. 그 밑도 끝도 없는 피해의식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 때는 ‘피해자가 피해의식을 갖는 건 당연하다’는 나의 평소의 생각을 떠올릴만한 여유도 없었다.
‘의도와 상관없이 내 노력이 그렇게 비춰졌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낫겠다’ 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기자로서의 신분도 망각하고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다가 정신을 차리고 김조광수 씨를 바라보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주억거림이 순간 따뜻하게 느껴졌다.
“재벌 2세가 노동자의 삶을 알기 위해 노동자인척 하고 공장에 간 경우, 진짜 노동자들이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과 환원시켜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요? 소수자는 억압된 구조 속에서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가질 수도 있어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저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가끔 제 자신을 돌아 볼 때 ‘내가 왜 이렇게 수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지?’할 때가 있어요. 콤플렉스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해요. 소수가 다수를 포용할 수는 없잖아요. 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죠.”
그의 말을 듣다보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남자가 ‘저도 페미니스트예요’라고 말했을 때 그가 기특한 한편으로 ‘니가 뭘 안다고’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소수자를 위해 살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기득권이 보물처럼 박혀있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때로 의심했었다. 어쩌면 이성애자인 내가 성소수자 인권을 들먹거리는 것이 그들에게 삶인 영역을 내가 취미로 잠시 건드린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그 때의 내 ‘피곤했던’ 감정이 후회스러웠다.
영화 얘기로 말을 돌렸다. 그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라는 영화로 감독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연극영화전공인데 배우를 하기에는 자의식이 강했고, 커밍아웃하기 전이여서 그런지 감추려는 것도 많아서 모든 것을 오픈해야 하는 삶을 살기는 힘들 것 같았고, 연출은 겁나고 그래서 제작만 해왔던 그다.
처음하는 연출이라서 힘든 점도 있고, 어쩌다 보니 언론에 알려지게 돼서 만들다가 잘 안되면 “아 그거? 만들려다 말았어!”할 수도 없게 됐다고 즐거운 울상이다.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없느냐고 묻자 제작비가 없는 것도 사실 어렵다고 한다. 친구사이에서 모금이 되면 그걸로 영화를 만들고, 그 수익금을 다시 친구사이에 후원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단편이라서 상영은 일반 극장이 아니라 영화제나 독립영화상영관에서 할 예정이다.
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했다.
“기본적으로 멜로인데, 로맨틱 플러스 코미디가 될 거예요. 코미디는 이문식의 기타맨 연기 때문에 그렇구요. 주인공 민수의 마음은 기타맨이 다 설명을 해줄 거라서 주인공은 눈빛연기만 하면 되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왕의 남자, 커피프린스 등 인기몰이를 했던 작품들에서도 동성애 코드가 있었다. 달라진 토양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물었다.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 성소수자가 주위에 전혀 없는 것처럼 하는 것보다는요. 부정적 요인도 있기는 하죠.”
-동성애를 스테레오 타입화 하지는 않나요? 남자 같은 남자와 여자 같은 남자. 그것이 게이의 사랑방식인 것처럼 도식화 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이를 테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처럼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건 왠지 좀 아닌 것 같고……
“물론 있죠. 그러나 관중의 심정적 기반을 고려해야 해요. 마초 두 명의 사랑을 그린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은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없어요. 만들어 놓았는데 관객이 외면한다? 그럼 퀴어 영화의 기반이 더 약해지는 거죠. 일반 관객들이 동의해주기 쉬운 수준에서 영화를 만들어 토대를 닦은 다음에 확장해나갈 수 있을거예요. 미국에서도 브로크백마운틴 이전에는 수많은 퀴어영화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초기단계니까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개성있고 완성도 높은 영화.. 청년필름만의 영화스타일을 굳히고 싶지는 않아요. 레인보우처럼 다양한 색깔이 나름의 하나로 묶이는 그런 영화제작자가 되고 싶어요.”
-올해의 계획은.
3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는 거요. 작년에 독립영화만 세 편 찍었는데, 올해는 상업영화1편, 독립영화 2편 정도 만들면 좋겠어요. 또 시작한 영화도 연출자로서의 능력을 스스로에게 또 외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좋겠고, 친구사이에서 커밍아웃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들이 ‘동성애가 내 얘기일 수 있다’는 준비를 하게 하는 것.. 그렇게요.
직접 만난 그는 생각보다 젊었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젊어보이세요.”라고 말하자 “젊게 살려고 노력해요. 영화사 이름도 옛날 청년이었을 때 지었던 이름 그대로 ‘청년필름’이에요.” 그의 블로그 ‘네버랜드’에서처럼 나이를 먹지 않고 계속 힘있게 좋은 영화를 만들고 한국 성소수자 인권의 지평을 넓혀가기를 바란다.
취재_곽경란, 장현희 공감 6기 인턴
글_ 곽경란 인턴 / 사진_곽경란, 장현희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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