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아라칸족 난민들의 이야기_ 황필규 변호사
공익변호사의 변
버마 아라칸족 난민들의 이야기
–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
황필규_공감 변호사
얼마 전 버마 아라칸족 난민캠프의 실태, 다국적기업의 가스개발에 따른 인권침해가능성 등을 조사하러 인도 미조람주의 아이졸시에 다녀왔다. 이 난민캠프가 버마 국경 내에 있고 인도 측이나 미얀마 측에서 외부인의 진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관계로 난민들이 며칠 동안 버스를 타고 그리고 걸어서 아이졸시까지 와서 면담을 진행하였다.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다. 이 글은 이들과의 만남을 가졌던 이틀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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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수)
숙소에서 아침 9시부터 바로 면담에 들어갔다. 오전에 면담할 사람은 모두 4명, 우리도 그렇지만 면담을 하러 온 사람들도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았다. 면담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우리 소개를 하고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가스개발사업 뿐만 아니라 아라칸이나 난민캠프에도 관심이 있다는 점, 비밀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 자유의사에 의한 면담이라는 점을 밝히고, 구체적인 사실을 답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첫 면담자는 2003년 난민캠프에 오게 된 30세의 청년이었는데 생산량보다도 더 많은 곡식을 요구하는 군대와 지방기관 때문에 토지까지 팔아 할당량을 채우다가 결국 더 이상 팔 토지도 남지 않고 굶어죽게 생긴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제노동을 강요받고 군화발과 죽봉으로 구타당하고 성적으로 모욕당했으며 그의 임신한 아내조차도 노동을 강요당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담담하게 설명하였다. 다국적기업의 가스개발에 대해서는 가스관 건설 경로 주위의 마을에서 토지가 강제수용되고 도로 건설과 이를 위한 채석, 채벌에 강제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가스관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주민들의 삶이 악화될 수밖에 없고 강제수용, 강제노동, 강제징수, 기타 각종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등 모든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난민캠프에 강압적인 군대와 강제노동이 없다는 것 뿐, 전기와 물 공급이 없고 의약품과 먹거리가 부족하고, 교육 받을 시설도 마땅하지않다는 것이다. 끝으로 면담을 위해 먼 길을 오면서 힘들기는 하였지만,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며 우리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할 때에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여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아라칸 지역이나 난민캠프의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은 다른 면담자들도 대동소이 하였는데 두 번째 면담자는 2000년 난민캠프에 오게 된 37세의 남자로 15년간 몸담았던 군대에서 탈출한 사례였다. 교육받지 못하였고 아라칸족이라는 이유로 승진과 급여에서 차별받고 언어폭력 등 온갖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해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군대 내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는데 군대 내 구타가 일상화되어 있고 급여를 거의 받지 못하는 때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특히 카렌지역에서의 군사행동 시에는 지휘관이 1) 카렌 남자를 발견하면 때리거나 죽일 것, 2) 카렌 여자를 발견하면 묶거나 강간할 것, 3) 먹을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빼앗을 것 등을 지시하였고 일부 군인들, 특히 다수민족인 버마족 군인들은 이 지시를 따랐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보았고, 16세의 카렌 소녀를 군인들이 강간하고 죽인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대대가 이동할 때에는 강제 동원된 400여명의 주민들이 음식과 군수품을 며칠이고 운반하였다고 했다. 막연히 그리고 우연히 외국기관이나 단체의 인권보고서에서나 접했을 법한 무자비하고 잔혹한 현실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바로 내 눈 앞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솔직히 쉽게 실감이 가지는 않았다.
세 번째 면담자는 45세의 남자로 난민캠프에 온 지 거의 17년 가까이 된 사람이었다. 군대가 비용과 시간을 요하는 모내기 방식을 강요하고, 논의 물 수위를 자기 멋대로 통제하고, 마을의 야간 경비까지 강요하였으며 경비 중 졸면 귓가로 실제 총을 쏘기도 하였다고 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다른 면담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인데 이러한 피해가 면담자들 개인에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면담자들 마을 전체 주민들에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가해졌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네 번째 면담자는 통역을 해 준 미국국적 버마 활동가의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37세의 남자로 군대에서 도망쳐 나온 병장 출신의 난민이었는데 어렸을 적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이렇게 다른 위치에서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운명은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년간 군대생활을 한 그는 올해 난민캠프에 오게 되었는데 주민들에게 무리한 벌목과 가축의 상납을 강요하도록 명령받아 괴로웠고 그것이 군대 간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탈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그 역시 주민들에게 강제노동을 지시한 적이 많았으며 카렌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할 때에는 지휘관이 모든 마을을 불태우도록 지시했다는 언급도 했다. 군인들이 여고생을 강간하고 속옷으로 입을 틀어막아 살인한 사건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군대 내 급여삭감이 비일비재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함을 지적했다. 군인들의 급여삭감은 필연적으로 주민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현실, 그러나 그들의 진술은 너무도 일관되고 일치했다. 군부의 교체 없이 이러한 현실의 타개가 과연 가능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우울한 심정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여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이졸시가 산꼭대기에 경사지게 위치한 도시라서 좁은 시장골목을 한참 걸어 내려가 식당을 찾았다. 60년대, 70년대 한국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이곳, 난민들에게는 이곳이 천국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보고서로만 접하고 말로만 듣던 현실, 그 현실에 내가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웠다.
면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식사하러 나가는 길에 오늘 면담한 난민들 대부분이 밤 버스로 난민캠프로 돌아갈 예정이라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생존 자체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군부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인권침해. 무엇이 과연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개발의 이익은 주민들에게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11월 8일(수)
오늘은 주로 여자들이 면담 대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면담 대상인 여성 4명 모두 미성년자였다.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나 고충 등 별도의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면담 대상에 성인여성이 포함되지 않은 사실이 많이 아쉬웠다. 면담 장소는 버마인의 가정집이었는데 추측컨대 현지 안내인 중 한 명의 집인 것 같았다. 국제민주연대 활동가와 나에게만 따뜻한 자리를 주고 면담할 사람들은 모두 찬 바닥에 앉도록 되어있었다.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할 겸(면담에서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면담 받을 사람이 편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리를 바꿨다.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까 면담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눈물이 났다.
처음 면담을 한 소녀는 17세로 아라칸 지역에 있을 때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부모의 토지가 강제수용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부모와 함께 2004년 난민캠프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6살 때 무면허의사에게 주사를 잘못 맞아 한쪽 다리가 마비되어 본인이 강제노동에 동원된 적은 없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라칸 마을에 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드라마를 접한 적이 있다고 했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싶고, 컴퓨터를 제일 가지고 싶고, 장래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다고 했다. 읽을거리로는 잡지나 책 등이 조금 있으나 거의 없고 필기구는 있는 집도 있고 없는 집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16세의 소녀는 2003년에 난민캠프에 왔는데 학교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고 했다. 마을에 있을 때 부모가 강제노동을 강요받았고 본인도 10세 때부터 4년 동안 거의 매달 3~5일씩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돌과 나무를 운반하는 일을 강요당하였다고 한다. 몸이 너무 약해서 지쳐 죽을 것 같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국은 아라칸 마을에 있을 때, 마을을 돌면서 돈을 받고 상영하는 영화나 비디오를 보고 처음 접하였고 앞의 소녀와 마찬가지로 학교로 돌아가고 싶고 컴퓨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고 장래 직업은 의사를 희망한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룹을 나눠서 하는 전통놀이 정도라고 했다.
이들 중 제일 어른스러워 보이는 또 다른 17세의 소녀는 올해 난민캠프에 왔는데 6년 전에 부친이 쌀을 다른 지역에 팔았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한밤에 찾아와 부친을 잡아가서 손을 묶고 때리고 여러 날 동안 구금하면서 집안의 모든 재산을 가져갔다고 했다. 부친은 그 때 난민캠프로 도망쳐왔고 최근까지 부친의 행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6년 동안 풀 깎기 등 강제노동에 동원되다가 부친과 연락이 되어 모친과 다른 형제들과 난민캠프로 왔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하니까 “한국 드라마에서 한국학생들이 학교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았는데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한국 학생들이 나의 삶을 이해하고, 나의 느낌과 고통을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나누고 언젠가 서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계속 눈물이 나와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남은 두 아이는 9세가량의 여자애와 남자애였는데 여자애의 경우 부모가 1989~1990년 경에 난민캠프로 왔고 본인은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장래 학교 선생이 되어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이 가르치고 싶다고 하면서 오늘의 만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애의 경우 몇 년 전에 부친이 먼저 난민캠프에 오고 본인은 올해 이곳에 왔는데 마을에 있을 때는 공부를 잘 하였다며 지금은 공부를 할 수가 없어 슬프다고 했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하여 다들 의아해하면서 되묻자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착한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국 아이들이 난민캠프로 놀러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이 아이가 그 미소를 앞으로도 계속 간직할 수 있기를.
이렇게 아이들이 많을 줄 알았으면 뭐라도 선물을 준비 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미치면서 혹시 나누어줄 것이 없을까하여 가방을 뒤져보니 온갖 필기구가 잔뜩 들어있는 필통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쓸 최소한의 필기구를 남기고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면담이 끝나고 오후에는 버마활동가의 주도 하에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 갔다. 이런 시장을 들러보고 물건을 사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닌지 아이들은 마냥 신기해하며 옷가지, 신발, 축구공 등을 샀다. 필기구만 준 것이 좀 뭐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공책을 하나씩 선물로 사주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과도 작별인사. 과연 이 꽃들에게는 희망은 있는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동안 이 면담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진행시켰던 아라칸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25세인 그는 아라칸주 수도의 Site-tway대학 출신으로 애인을 남겨놓고 5개월 전 난민캠프로 왔다고 했다. 2001년 대학교 1학년 때 대우 인터내셔널에 대하여 처음 들었고 친구들을 조직하여 플래카드, 유인물 등을 Site-tway 시내와 지방에 부착하고 배포하고 태국의 인권단체 등에 아라칸 지역 사진을 찍어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정보기관이 본인의 활동을 파악하였고 지도자로 지목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껴 다른 친구들은 남고 본인은 난민캠프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가스관 건설 예정 경로 상에 군대의 배치가 급증하였고 군대의 배치와 이동은 필연적으로 온갖 인권침해를 수반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본인이 국경수비대, 반군 등과 난민캠프와의 관계 형성, 유지를 담당하고 있고 난민캠프도 점차 조직체계가 갖추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들이 난민캠프로 직접 온다고 들어 임시 숙소도 짓고 음식도 준비하였다고 말할 때에는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전에도 오기로 되었다가 취소된 경우가 2번 있었는데, 밤 11시에 갑자기 올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다음날 5시에 일어나 난민들과 이곳 면담장소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이 난민캠프는 태국, 버마 국경지대의 난민캠프들과는 달리 외부단체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못하고 어떤 단체가 매년 3개월치 의약품을 매년 지급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다국적기업이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전기시설을 건설한다면 반응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주민이 소유한 온전한 담배 한 가치를 가져가면서 재떨이의 꽁초를 주워준다면 만족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꽁초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가정적인 질문이 던져지고 나도 끼어들어 “당신은 얼마의 돈을 받으면 가족들의 강제노동에 동의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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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라칸 아디들의 맑은 미소가 눈 앞에 떠오른다. 과연 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가. 이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하여 우리가 노력하여야 할 것이 없을까. 특히 아이들의 교육 등에 대해서는 시급한 지원이 요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렌족이나 친 족과는 달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라칸. 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인류애를 위해 누군가 이들 난민캠프를 지원할 수 있었으며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꽃들에게 희망을.
* 버마 아라칸 난민캠프를 어떤 식으로든 지원해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하지만 외부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고 난민캠프 자체도 제대로 된 조직체계가 잡혀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 면담 내용 외에도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관계자들에게 외부지원을 받으려면 내부 민주주의와 투명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곳 지원에 관심 있는 분이 계시면 함께 지혜를 모아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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