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은 누구의 몫? – 레깅스판결 뒤집은 대법원 판결로 보는 ‘성적 수치심’
들어가며
흔히 불법촬영이라고 하는 범죄는 1.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2.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3.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 크게 세 가지를 구성요건으로 한다(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
2020년을 핫하게 달군 ‘레깅스 판례’(이하 원심 판결)는 2번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가 쟁점이었다. 이 사건은 판결 선고 후 열람 가능한 판결문에 피해촬영물을 첨부해 또 뭇매를 맞았다(관련기사 바로 보기). 그러다 지난 2020. 12. 24. 대법원이 원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을 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문제된 사실관계는 피고인이 버스에서 내리려고 서있는 피해자의 뒷모습을 몰래 8초 동안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촬영 대상은 레깅스를 입은 피해자의 하체 뒷모습이었다.
성적 수치심? 인정 못하겠다는 원심
문제가 된 원심 판결(2019. 10. 24. 선고 의정부지방법원 2018노3606)은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피고인이 몰래 촬영한 것은 인정되지만 그 대상이 성적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성적수치심을 느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보아 무죄라 판시했다.
– 직접 노출되거나 엉덩이 강조하지 않음
헐렁한 상의가 엉덩이 바로 위로 내려오고, 직접 노출된 부위는 목, 손 발목부분이 “전부”임, 특별히 피해자의 “엉덩이 부위를 확대하거나 부각”하지도 않았고 이는 “통상적인 시야에 비춰지는 부분을 그대로 촬영”한 것에 불과함
– 레깅스는 일상복, 피해자도 그거 입고 대중교통이용할 정도
레깅스는 일상복으로 몸매가 드러나는 스키니진과 다를 바가 없고 “피해자도 그와 같은 옷차림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했던 것으로 볼 때 레깅스 입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볼 수 없음
– 분노 정도는 성적 수치심 아님
신고 직후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한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진술로는 피해자가 느낀 감정을 “불쾌함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 단정할 수 없음”
대법원, 성적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 명시
대법원(2020. 12. 24. 선고 2019도16258)은 다른 판단을 했다. 또 성적 수치심에 대한 합리적 판단 기준을 제시 한 부분도 여러 번 읽게 된다.
대법원은 먼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보호법익은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 및 일반적 인격권 보호,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성적 자유와 함부로 촬영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존 판례를 다시 확인하고, 이에 더해 “여기에서 성적 자유는 소극적으로 자기 의사에 반하여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면서 촬영 대상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타인의 신체에 해당하는지는 “신체의 부분으로 일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촬영의 맥락과 결과물을 고려하여 그와 같이 촬영을 하거나 촬영을 당하였을 때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 한다”고 보고, “피해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고” 섣불리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피해자 자신이 드러낸 신체라도 의사에 반한 성적 대상화를 거부할 자유를 ‘새삼’ 인정받았다. 무슨 옷을 입고 어디에 갈지 선택할 자유와 성적 대상화를 거부할 자유 중 양자택일을 당연시 여기는 암묵적 전제를 치워버린 것이다. 피해자가 입은 그 옷, 그 옷을 입고 버스를 탄 것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신체부위를 해석하는 주된 요소는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원심은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림과 동시에 이 사건 촬영 정도의 성적 대상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듯 ‘통상적 시야’로 합리화 했다. 성적 대상이 되기 싫으면 그 옷을 입지 말았어야 한다거나 그 옷을 입고 거리에 나왔다면 그 정도 시선을 감수하라는 식이다. 정확하게는 그런 양자택일이 (보통) 여성에게만 강요된다는 부당한 사실(성별 권력)엔 관심 없다는 부끄럽고 창피한 고백이다. 수치심을 느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사안의 경우 직접 노출되지 않더라도 촬영된 부위가 엉덩이였던 점을 지적하면서도, 노출된 부위 외 하체 중심의 촬영 방법 등이 ‘성적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또 촬영물이 하반신 위주로 찍힌 것을 보아 피고인측의 “몸매가 예뻐서 찍었다”는 심미적 충족 목적이란 주장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의사에 반하여 촬영 당하는 맥락이 성적 수치심 유발 가능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디지털 성범죄의 특수성, 촬영되어 영원히 박제되어 떠도는 피해의 특성 상 성적 수치심 인정 가능성도 확인했다는 점이다. 촬영결과물만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 당하는 맥락”에서 성적 수치심이 유발 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사에 반해 촬영당한다는 행위로 인해 “고정성과 연속성 확대 등 변형 가능성과 전파 가능성 등에 의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고 나아가 인격권을 중대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성적 수치심의 해석이 촬영결과물 뿐 아니라 촬영의 전후의 맥락에 따라 더 구체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해 감정의 다양한 층위 존재, 부끄러움이나 창피함 강요 말 것
대법원은 원심이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협소하게 해석한 것도 지적했다.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이를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만으로 협소하게 볼 경우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적 수치심 인정 여부는 피해감정의 다양한 층위와 구체적인 범행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처지와 관점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보면서 사안처럼 피해자가 느낀 분노도 충분히 성적 수치심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수치심을 강요하는 것은 피고인도 아닌 피해자의 감정을 사법부가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도 이상하지만, 사법부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피해자를 윤리적으로 평가 하고 ‘찐 피해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성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발생하는 강제추행이나 강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미비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형사 고소에 대해 가해자 측이 무고죄로 맞고소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 된 현실은 입맛에 맞는 피해자만 피해자로 인정하는 이런 잘못된 전제를 악용한 결과다. 부끄러움을 피해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은 정의도, 배려도 아니다. 피해자에게는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네 책임이기도 하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면 침묵하라는 강요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두 같은 맥락이다.
나가며
“피해자에게 호감을 느껴”, “피해자의 몸매가 예뻐서” 원심이나 유사한 판결문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로 언급된 문장이다. 피고인의 범행 동기인데, 상식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판결문을 잘 보면 맥락상 피고인에게 악의는 없었다는 유리한 진술로 역할을 한 것 같다. 판결문을 보며 느끼는 창피함은 우리의 몫.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와 그의 편에 선 원심)의 몫. 유리한 양정이 될 ‘진정한 반성’의 시작은 부끄러운 줄 아는 마음 아닐까.
백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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