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굶주리는 사람들
충분한 먹을 것과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가난으로 인한 불치병에 시달리지만 치료비를 구하지 못해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길거리에서, 역전에서, 텔레비전에서. 그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해 줄 수 있는 방편도 이젠 전화 한 통화에서 온라인 기부문화, 단체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간편하고 다양해졌다.
그러나 앙상하게 마른 모습들과 눈물이 브라운관에서 반복 상영될수록 이는 당연한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해 가고, 지하철 안을 오가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더는 벌거벗은 눈에도 새롭지 않다. 굶주림에 대한 사회 전체의 체념과 이 무심함은 과연 우리의 인간성이 메말라서일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많은 생각을 해 봤다. 나는 갖가지 인권 쟁점에 관심이 많아 오래 활동해오고 있는데 왜 빈곤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국제원조단체를 거쳐 방글라데시의 나이 어린 친구를 돕는 데 쓰이기 위해 매달 빠져 나가는 이만 원을 통장 내역에서 확인하고 그 친구에게서 전달되어 오는 예쁜 편지들을 받을 땐 왜 분명하고 힘찬 기쁨이 마음에서 솟아오르지 않는가에 대해서.
내가 아무리 돈을 보태도 이 세계의 빈곤이 개선될 것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개선은커녕 심지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도 가져오기 힘들 것 같다는 좌절감, 국제원조단체의 능력에 대한 반신반의함이 우리의 희망에게 체념을 부추기고 있는 것 아닐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최소한의 식량도 구하지 못해 팔이 이쑤시개처럼 말라붙고 시력마저 잃은 아이들은 사진과 브라운관에 갇혀 점점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간다. 유엔 인권위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해온 장 지글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빈곤의 해결을 막는 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연도태? 어쩔 수 없는 운명?
숙명적인 기아가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확실한 수단인 것처럼 인식하는 행동을 심지어 국제회의나 유엔 책임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무의식적 인종차별주의를 담고 있는 이 어리석은 개념을 처음 사용한 18세기 말의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는 질병과 배고픔이 이 사회에 필수적 기능, 즉 지구상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이런 맬서스의 주장은 산업화 초기의 국민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오늘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걸까. 지글러는 맬서스 이론이 사람들의 심리적 기능을 충족시킨다고 본다.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어찌 일반적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랴, 불합리한 현실에 사이비 이론을 덧씌워 바라보지 않고는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가진 자들의 이득을 위해 활용되는 기아
제3세계 곳곳에는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아직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굶주리고 있을까. 20세기 전반까지 강제되어온 식민지정책으로 인해 아프리카 주민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공업이 발달한 유럽엔 대량의 농산물을 사들일 구매자들이 있었고, 식민지 권력자들은 유럽 시장에서 소비될 수 있는 작물을 아프리카 농민들로 하여금 대규모 농장에서 집중적으로 경작하게 한 것이다.
‘신식민지정책’은 독립 후에도 이들 나라에 남아 있는 식민지 엘리트들이 구종주국의 눈치를 살피는 데서 발생한다. 유엔 총회 및 그 밖의 국제기구에서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얻을 수 데에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프랑스 식민지로서 오로지 땅콩 농사에만 매달리도록 강요받았던 세네갈은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 비옥한 땅을 자국민들이 아닌 수출용 작물에 꾸준히 돌림으로써 식량부족과 높아져가는 식량의 외국 의존도에 시달리고 있다.
기아는 심지어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유니세프는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봉쇄로 인해 5세 미만의 아이들이 매달 5,000~6,000명이나 생명을 잃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프랑스 매거진 <리베라시옹>의 표현에 따르면 “이라크에서는 유엔이 민족 살인의 주범이 되고 있다.” 기아는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도 악용된다.
한 예로 세계 제2위의 식품회사 네슬레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70년 칠레의 대통령이 된 아옌데의 공약 중 하나는 아이들의 영양실조를 해결하기 위해 15세 미만 아동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네슬레의 판매 거부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유는 미국 닉슨 대통령과 그 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옌데 사태는 1973년 CIA의 도움을 받은 피노체트 장군의 군부쿠데타에 의해 그가 살해됨으로써 막을 내리고, 그 에피소드는 피노체트의 무차별 탄압 아래 사망한 수많은 시민들과 영양실조와 배고픔의 지옥으로 다시 떨어져 내린 수 만 명의 아이들의 산으로 메워졌다.
시장가격의 이면
캘리포니아의 ‘피드 롯’이라는 곳에는 1만 마리 이상의 소들이 한정된 공간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갇혀 있다. 이곳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많다고 한다.
수확량에 이어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시카고 거래소의 투기꾼들이 제시하는 곡물가격이다.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농산품 가격이 투기의 영향 하에 부풀려지고 있다. 미국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좌우하는 몇몇 금융 자본가들이 전 세계 곡물 매매가를 결정하고 있다.
국제적 거래가격은 보수 경제학자들의 주장대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장 합리적인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덤핑 전략이나 그 반대로 시장에서 상품을 거두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일부 곡물메이저 및 투기꾼들의 조작을 통해서도 결정된다. 가격이 복종하는 단 한 가지 원칙은 이윤 극대화의 원칙. 시카고 거래소를 주름잡는 자들의 관심사는 수백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는 것이지 배고픈 자들의 고통이 아니다.
무능한 국제기구
이런 세계에서 국제기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국제기구는 어느 지역이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해야 하는데, 예컨대 세계식량계획은 소말리아나 수단 남부의 상태가 더 열악하다는 판단이 떨어지자 그때까지 그루지아에서 효과적으로 진행해오던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
한 지역 내에서도 제공할 수 있는 의약품과 식량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잔인한 선별 심사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난민 캠프를 찾은 지글러는 죽어가는 아이들이 의료진의 판단에 의해 가망이 있는 집단과 가망이 없는 집단으로 구분지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식량과 의료품이 충분치 않아 몸과 뇌가 아직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지 않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 것이다. “댁의 아이는 너무 약하고, 우리의 배급량은 너무 빠듯해요. 그래서 아이에게 손목밴드를 줄 수가 없어요.” 간호사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느 나락으로 추락할 것인가. 15년 전 지글러가 아고르다드에서 목격한 이 광경은 지금도 제3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수백 개 병원과 난민 캠프 입구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구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식량기구의 예산을 늘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언급했듯 수확기가 지난 후 세계의 곡물시장에서 사들일 수 있는 식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엄청나게 불합리한 구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7초마다 1명씩 기아로 인해 목숨을 잃는, 6분에 1명씩 비타민A의 부족 혹은 썩은 물과 접촉함으로써 시력을 잃고 있는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다. 부자들의 부가 하늘을 찔러가는 이 세계 한 편에서 벌어지는 저 무수한 익명의 죽음들.
지글러가 구상한 아프리카의 기아 해소책을 실제로 자기 조국에 적용하고자 했던 부르키나파소의 혁명가이자 지도자였던 상카라는 자기 동료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개혁정책이 주변국들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것을 두려워 한 프랑스 정부 일부 세력 등 외국의 사주였다. 소말리아에서는 유엔이 지원하는 곡물을 현지 군벌이 가로채 오히려 세력을 더 키우는 현상까지 벌어졌으며, 그 외에도 국제기구 자신의 판단 착오로 해당 지역의 착취 군벌에게 지원이 돌아가 파괴적인 분쟁 상태를 도리어 영구화시키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경제력은 다혈질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특권으로 가득 찬 세계와 굶주리는 세계 사이에 있고, 역사가 흐르면서 영양 섭취는 점점 더 사회적, 정치적, 재정적 힘의 문제가 되었다.
세계화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다른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 법칙은 오늘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증시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은 이윤 극대화, 손실에 대한 공포, 파산 리스크에 따르는 신경전, 그리고 정신착란과 황홀경을 되풀이하는 무제한의 이윤추구 등이기에.
만성적 실업난과 양극화, 영양실조가 이제 북반구도 위협하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초국적화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가 이들의 운명을 위협하고 지배하는 가운데, 지글러의 표현에 따르면 익명의 희생자들은 무기력하게 장기질환을 경험한다. 이 세계의 모든 소외의 문제는 역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랜드 농성장에 몸도 목소리도 봉쇄당한 익명의 고통에 처해 있는 한달 80만 원짜리 아주머니들을 비롯한 비정규직들의 눈물과 정규직들의 잔업과 성과급에 저당 잡힌 목숨 위에 서 있는 오늘 한국의 현실과 저 아프리카 남부의 아이무덤들은 일관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어져 있다. 이런 세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불평등이며, 국가와 민족주체성과 인권 기준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제약을 거부하고 자본을 위한 자유만을 남길 것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에는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인가 하는 철학적 고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경제 합리성이라는 구호만 난무할 뿐.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 “배고픔은 숙명이 아니다.”
기후가 변덕을 부릴 때마다 수많은 농민들이 기아의 골로 추락하는 니제르의 사막 밑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으니 지하수를 현대적 펌프 공법으로 퍼 올려 농업 관개용수로 공급하면 문제는 비교적 손쉽게 해결될 것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일지라도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다.
원조보다는 개혁이라는 그의 주장에 의하면 혁명적인 행동은 인도적인 구호를 뛰어넘는다.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성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함을 넘어선 죄악이며,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지글러는 세계경제의 모든 메커니즘이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기아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제일주의의 불평등의 원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부의 소수집중에 종사하고 익명의 죽음들을 방관하는 데 심리적 면죄부를 마련해줄 것이다. 지글러의 말처럼 민중이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세계시장에 규범과 협약을 마련해야 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희망이 있는가?
우리가 이미 인류의 질적 도약을 목격했다는 지글러는 국가가 처음 성립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든다. 이때 인간들은 처음으로 친족의 경계로 넘어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로 연대감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공동체 의식과 모두에게 구속력을 갖는 법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이 지구가 인간다운 지구로 변화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관건은 어떻게 연대하고 싸워 나가는가이다.
그 역시 맬서스 식의 자연도태 이론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인간적 지구를 만들기 위한 한 걸음에 기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가 역설하듯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 인류의 6분의 1을 파멸로 몰아넣는 세계질서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실명한 눈과 더 손쓸 수 없이 죽음에 가까워진 몸 위에 축적해 올리는 부를 향한 광증과 조작의 논리는 역사에서 사라져야 한다.
진보라는 말은 이런 퇴장의 순간에 어울릴 것이다. 한 국가 안에서 누가 진보이고 보수인가를 가르는 구분법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민중을 구조조정과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농성장 문을 용접하고 공권력을 투입하는 자들, 나라 경제를 초국적 기업의 투자자들에게 내맡기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이들 중 누가 자신의 나라를 생각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가. 시장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시장 외적인 자유와 권리를 파괴하는 이들에게는 ‘신자유주의’라는 기만적인 이름이 어울린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유엔의 특별 기구들을 포함한 국제기구들은 5대륙에서 매일 자기모순을 안고 활동하고 있고, 세계은행과 IMF, WTO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에 해당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한 적대적 민영화와 규제철폐정책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구조를 더 황폐화시키고 있다.
한동안 국제기구에서 일할 것을 전제로 준비해온 나는 거대 국제기구 자체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 마음을 돌렸다. 가장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사회 구조와 인식의 재구성을 모색해 가자는 쪽으로. 희망은 새롭게 탄생할 전 지구적인 민간단체에 있다는 지글러의 말이 이 시점에서 더욱 반갑다.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그리고 다국적 자본과 그 과두제에 저항하는 노조들의 세계적 연대만이 ‘워싱턴 컨센서스’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 깨어 있는 그의 심장과 아고르다드의 난민 캠프에서 체념 대신 되새긴 투쟁과 희망의 의지에 지지를 보낸다. 봄의 생명을 지닌 이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축복이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절대로 안 되며 또한 남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고 부처가 말했을 때 그의 전제는 ‘그는 나와 같고 나 또한 그와 같다’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의 고통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있음으로 해서 이렇게 일시적으로 나란 존재도 있다. 누구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통찰은 이런 인식의 전환에서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